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보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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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보자(하)
  • 지호원 작가
  • 승인 2020.03.2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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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원 작가의 글쓰기 강좌(20)

 

일기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일기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 너무 외로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날, 안네처럼 자신의 마음을 일기 속에 모두 털어놓아 보자. 형식과 문장 표현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이 가장 편한 방식으로 글로 적어보는 것이다.

나만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세상 이야기도 써보자. 내 가까이 있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 반려동물들에 대해 써보자. 점심시간 식당에서 본 사람들 모습, 음식, 갑자기 날아든 부고(訃告)에 대한 기분 등등 이야기 소재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 아주 많다. 다만 지금까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 된다. 안네의 경우 일기를 쓰면서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하듯 자신의 마음을 문자로 기록했다. 그 누군가는 친구가 될 수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글은 쓰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어떻게 표현해야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의 첫걸음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내 마음의 생각을 문자화해보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느 해인가 필자가 쓴 일기 2편을 소개해본다. 하나는 수필 형식으로 다른 하나는 편지 형식으로 쓴 것이다.

(일기 예시 1)

“가을볕이 넉넉하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옛 가요를 들으며 바라보는 유리창 밖의 가을볕은 더욱 넉넉하게 다가온다. 시월도 어느새 중순을 훌쩍 넘겼다. 이제 두어 달 남짓 지나고 나면 이 해(年)도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시간뿐일까 마는 가을이 깊어갈수록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사람과의 인연도 그중 하나다.

지난밤, 십여 년 전 잠시 알고 지내던 사람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나와는 어떤 일 때문에 그리 편치 않은 관계였던 그분의 사망 소식은 넉넉한 가을볕 속에서 새삼 인생이란 너무도 미약하고 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쓸쓸함을 가져다주었다.

백세시대를 운운하는 시대에 망자는 이제 육십을 갓 넘은 나이이니 죽음을 마주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나이가 분명하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 나이순으로 차례차례 다가오는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식욕이 없고 피로하며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에게 들은 암 진단은 그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을까?

망자와는 가깝게 지내던 선배로부터 부고를 전해 들은 다음 날, 망설인 끝에 장례식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망자에 대한 서운함이 체에 남겨진 미세한 가루처럼 조금은 남아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오래전 끊어진 관계를 새삼 그의 부재로 인해 잇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 뒤에 남아 있는 아쉬움은, 어떤 인연이든 나와 한때나마 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힘없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마음이 멀어 발길은 닿지 못해도 따뜻한 가을볕 속에 사라진 고인의 명복을 빌어보는 이른 오후다.

                                                                                 2018년 7월 21일

 

(일기 예시 2)

“아버지, 이곳은 8월 중순이 되어도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계절과 기후는 아직 여름인데 제 마음은 어느새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선 편안하신지요?

며칠 전, 아버지 제사를 모시면서도 무엇인가 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덧 아버지가 살았던 생보다 10년을 더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세상사는 일은 어렵다고 느낍니다.

어제도 오늘도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거야 일상사가 돼버렸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외로움만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절, 어느 시인에게 떨어진 술병 속의 별은 어느새 잊혀진 전설이 되었지만, 지금 제 술병 속에는 떨어지는 별은 그리움으로만 차오릅니다.

돌아보니 아버지의 손을 놓은 이후 제게 유년의 기억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소년의 기억도 희미합니다. 청년의 기억은 우울로 시작됐고, 장년의 기억은 술잔 속에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머리 허연 중년의 기억은 현실 속에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직 히든카드처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노년은 또 어떤 기억으로 그려질지 오늘 하루도 소주잔 안으로 떨어지는 가을 오후의 햇살과 바람은 잔물결만 출렁이는 하루였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2016년 9월 28일

 

만약 이런 식의 전개가 부담스럽다면 다른 형식의 글을 한번 살펴보자. 2018년 3월 15일 문학 평론가 김명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일기 예시3)

“한 달쯤 전부터 보일러에서 누수 시그널이 어쩌다 한번씩 뜨다가 조금 잠잠하더니 이번 주 초부터 다시 빈번해졌다. 아무래도 내일쯤은 누수검사를 해봐야겠다 생각하단 차에 급기야 어제 한밤중 아랫집에서 올라와 천장에 물이 샌다고 난리를 쳤다.

기술자를 불러 누수 지점을 찾으니 싱크대 아래 메인 온수관 엘보우 조인트 부분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누수가 생기고 이웃 간에 사달이 나고 수리비가 들고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끔한 주방 타일 아래 저렇게 누추하고도 적나라한 생활의 근골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 새삼스러웠다.

그동안 짐짓 없는 척, 아닌 척하고 하고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서 누수가 발생하면 속절없이 다 파헤쳐져 이처럼 누추하고 번거로워지게 된다. 저 배관도 처음엔 견고하고 엄정했으리라, 오랜 시간 속에서 뜨겁거나 차가운 삶의 곡절을 넘나들다 보니 시나브로 저렇게 헐거워졌을 것이다.

인생에는 비약이란 없다. 비약한 것처럼, 아니면 운 좋게 생략하고 모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벙덤벙 건너뛰었던 부분들이 있다면 언젠가는 꼭 이렇게 되돌아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