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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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0.03.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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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책의 저자는 김규항. 더 긴말이 필요 없는 저자다. 그의 이름 석 자로 이 책이 담고 있는 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 거라는 거는 쉽게 짐작이 된다.

책의 표지에는 ‘김규항의 아포리즘’이라고 쓰여 있다. 그 표현대로 이 책은 격언이나 경구 같은 아포리즘으로 채워져 있다. 짧은 문장 하나하나에 사회를 보는 예리한 분석이 들어있다. 아주 짧은 문장에서는 일본의 하이쿠가 연상되고 조금 긴 글귀에서는 이솝이야기 같은 지혜를 느끼게 된다.

책을 펼치면서 가벼운 흥분에 들뜬다. 어떤 문장들이 내 머리를 깨우고 어떤 경구들이 내 가슴을 두드릴까.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냥 그의 아포리즘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힘.

-노예는 주인의 호사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노예의 나은 처지는 참질 못한다.

-인간의 세상을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모든 사람을 오로지 나만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이게 만드는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할 때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생각은 실은 내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수많은 체험과 충격과 학습과 주입 따위들이 내 신체를 거쳐 흐르다 남긴 자국 혹은 상처들이다.

-나는 어디서나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세계는 헤아릴 수 없는 옳음과 그름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대개 가장 세련된 처세술을 가진 위선자들이다.

-내가 문제 있는 부모임을 알아채는 결정적인 순간은 나 정도면 괜찮은 부모라는 생각이 들 때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자유가 넘친 시기는 그것을 누릴 여건이 가장 빈약했던 청년 시절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자유를 빼앗아간다.

-자발적 가난의 아름다움은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이미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난의 부당함을 따져야 한다.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제 머리통 속에 수집해놓은 동서고금의 온갖 지성의 부스러기들을 조금씩 내비치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 짓곤 하지만 정작 삶의 치열한 국면에서 그들은 그들의 지성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

-우리가 못한다 아쉬워하는 많은 것들은 실은 안 해도 그만인 것들.

-삼성을 타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삼성을 진심으로 경멸하는 것이다. 삼성 직원인 동창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동생이나 조카나 자식이 삼성 직원인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노동자, 혹은 노동자를 경멸하는 노동자로 키워지고 있다.

-한국 정치가 복구 불가능해 보일 만큼 썩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한국사회의 거울이며 한국정치인은 한국인의 거울이다. 우리에게 자성이 없다면 그들은 우리 앞에 불멸할 것이다.

-내일을 걱정하느라 평생 오늘을 생략하는 어리석은 삶이 자본주의가 만든 노예제다. 왜들 그리 체제 안에 못 들어가서 그 안에서 한 칸이라도 못 올라가서 난리일까. 꼭대기까지 가봐야 부자의 상머슴 노릇인데.

<교육, 아이>

-보수적인 부모들은 단지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라지만 진보적인 부모들은 아이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란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잘살 수 있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경쟁만 아는 영악한 소수로, 그 소수를 위해 인생을 보내는 다수의 바보로 자라간다.

-한국 부모들은 대학입시에 대해선 세계에서 가장 전문가들인데 대학 안 가고 사는 방법에 대해선 세계에서 가장 무지하다.

-아이가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 지금 덜 행복해도 된다는 생각처럼 위험한 게 없다. 오늘을 생략한 채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오늘은 없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열정이 없는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가능성은 없다.

-아이에게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정신적 성취들(학문적, 예술적, 문화적, 종교적)은 한낱 오물에 불과하다.

-세상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게 교양이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이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아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어른이라 불리는 인간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혹은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

-체벌은 어른의 교육적 무능을 자인하는 의식이다.

-어떤 악랄한 파시즘 체제도 ‘탄압’하기 위해 검열하지 않는다. 모든 검열은 순진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거의 언제나 ‘내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괴롭히고 ‘내 애인을 위하여’ 애인을 괴롭히며 급기야 ‘내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힌다.

<종교>

-신앙을 갖는다는 건 나와 온 우주 만물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 존재가 우주 만물의 일부일 뿐이라는 절대 겸손이자 내 신념에 우주 만물의 힘이 개입한다는 절대 용기다.

-성숙한 종교인은 다른 종교를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등산로’라 여긴다.

-인류 역사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보다 훨씬 해로웠고 여전히 해롭다는 것.

-예수는 이천 년 전 우리에게 해방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이천 년째 예수에게 욕망을 요구한다.

-분노와 용서는 하나다.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운 것일 수 있다.

-‘힘내’라고 쉽게 말하는 건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나눔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남은 걸 나누어 주는 게 아니라 남보다 많이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파렴치한 행동이 평범한 것이 되고 정상 범주의 행동이 특별한 것이 될 때 그 사회는 괴멸 직전에 있다.

-하느님 앞에서 부자는 합법적으로 이룬 부라 해도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죄인이다.

<정치>

-이상주의자의 시효는 이상주의적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선언되는 순간까지다. 그 순간부터 이상주의자의 역할은 이상주의적 사회의 훼손에 있다. 이상주의적 사회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속에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이념 공세에 관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레 필요 이상으로 위축될수록 저들의 힘과 권위가 배가된다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은 실은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려고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이다.

-지나간 역사, 다른 나라의 현실에서 명예를 선택하긴 쉽다. 게바라와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애호되는 건 그래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지금 여기의 역사에서 명예는 불편하거나 종종 적대시된다. 그 선택이 제 밥그릇과 안락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국익은 지배계급이 제 이익을 속여 부르는 말이다.

-노동자가 사람 대접받는 세상은 자본가가 비로소 사람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 힘은 우리 외부에서 제공되는 게 아니라 나의 참여로 만들어진다. 내가 참여할 만한 상태가 되기를 기다리는 한 그런 상태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성찰>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아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거고 깨닫는 건 그걸 내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책을 읽는 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다.

-현실을 넘어설 힘은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꿰뚫어 보는 식견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철학에서 나온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역사란 대중의 계몽이 관건인데 지금 한국은 지식인의 계몽이 관건인 참으로 희한한 역사의 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 자연스럽게 깨우치는 일상의 깨달음마저도 책과 이론을 통해서만 깨우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생경하고 현학적인 이론을 들먹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작가는 무한하게 상상하고 무한하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포기한 작가는 그저 비굴한 기술자일 뿐이다.

-천박한 음악 취향은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도 아닌, 고전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있다.

문장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뜻이 깊고도 놀랍다. 김규항은 항상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다. 채근담과 명심보감에 들어있는 옛날 경구에 놀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의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 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김규항의 책이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