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좋은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이 책은 듣기에 생소한 청소년시집이다. 청소년이라는 말이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있는 말이듯이 청소년 시 또한 시와 동시의 어디쯤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동시가 어른이 쓴 어린이의 시라면 청소년 시는 어른이 쓴 청소년의 시다. 쉽게 말한다면 어른이 쓴 중고생을 위한 시라고나 할까? 중고생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세대들이다. 이 시집은 그들을 표방하는 만큼 그들의 심정과 정서를 대변한다. 얇고 작은 책이라는 가벼운 마음에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다가 뜨거운 곳을 만지듯 깜짝 놀라게 되는 곳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한글을 깨우친 정도의 사람이면 누구나 그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이 시집은 그 쉽고 가벼운 낱말의 이면에 깊고 무거운 뜻을 함유하고 있다.
27년째 중학교교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현장에서 아이들의 땀내 나는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걸 청소년 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어른인 저자가 청소년 시를 쓰는 이유는 청소년들의 생활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걸 시로 표현해주는 어른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에 쓰인 시들은 그런 청소년들의 마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어른인 내가 봐도 시원한데 당사자인 아이들이 볼 때 얼마나 통쾌할지는 불문가지다. 그의 시에는 가볍게 읽고 웃을 수 있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학교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그래서 우리 어른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시들도 있다. 어떠한 시라도 모두 시로써는 무게가 넘친다. 함량초과다. 쓸데없는 독후감의 썰 보다는 직접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슬픈 ㄹ>
소나무는 솔과 나무가 합쳐진 말이야
합치면서 발음을 쉽게 하려고
ㄹ을 떨어뜨린 거지
하느님, 따님 같은 말도 마찬가지란다
어떤 말이 더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국어 선생님 말을 들으며
새아빠랑 살림을 합치면서
할머니네 집에 나를 떨어뜨리고 간 엄마를 생각했다.
<대통령감>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은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친구 동삼이도 대통령 할 수 있겠다.
게임에서 지면 떡볶이 사준다고 해놓고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딱 잡아뗀 게
벌써 몇 번짼지 모른다.
<교훈 뒤집기>
우리 학교 교훈은
정말 교훈적이야
바르고
굳세고
성실하게
아무래도 뒷부분이 빠진 거 같아
가령 이런 말
여러분을 가둬놓고 있습니다.
<배울 學>
공부에는 어차피 끝이 없다는데
조금 천천히 하면 안 될까?
공자님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다고 하셨지만
나는 기쁨을 느껴본 적 없으니
교과서 안에 갇힌 공자님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학교, 학원, 학생…
배울 學이 들어간 모든 낱말이 싫어지는
지금 이 순간이
먼 훗날
내 삶에 어떤 무늬로 새겨질지 몰라
배울 學
복잡한 획만큼이나
내 심사가 꼬여있는 탓일지도 모른다고
자꾸만 나를 자책하게 만드는
학문을 항문으로 읽을 때만 조금 즐거워지는
평생에 친해질 것 같지 않은
배울 學
<종례시간>
자상하신 거 알아요
집에 가다 사고 날까 걱정해주시는 마음
고맙지요
내라는 거 제때 안내고
청소 안 하고 도망가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요
오늘 수학 시간에 많이 떠들었다는 것도
완전 인정!
그래도 옆 반은 청소까지 끝났는데
마침표를 모르는 담임선생님
점 하나 찍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의리에 대해>
의리 없이 혼자 가냐?
의리 없이 혼자 먹냐?
의리 없이...
의리 없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의리 없는 놈이라는 말이다
청소도 같이 도망가야 하고
담배도 같이 피워야 하고
매도 같이 맞아야 한다
오늘도 친구들이 피시방에 가자고 꼬신다
안 돼, 내일부터 시험이야!
머리는 가지 말라고 붙잡지만
몸은 슬그머니 친구 뒤를 따른다
의리 없이 따로 놀기 좋아하는
몸과 마음 때문에
내 인생이 자꾸만 꼬여간다.
학창시절을 지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 것 하나도 공감하지 않을 게 없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털어놓지 못한 비밀> 등 가슴을 찌르고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그래서 유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런 시들이 가득하다.
◆학교는 입이 크다/박일환 시집/한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