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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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 지호원 작가
  • 승인 2019.12.1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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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원의 글쓰기 강좌⑧

‘삶이란 손님처럼 왔다가 주인처럼 살다가 나그네처럼 떠나간다’는 말이 있다. 또 시인 김용택은 ‘그랬다지요’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 / 사는 게 이게 아닌데 / 이러는 동안 /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 꽃이 집니다. / 그러면서 /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라는 표현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 속에서 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글쓰기는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 깊이가 깊고 넓으며 다변적이다. 따라서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마음을 바라보는 통찰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인간사회에서 인문학과 종교가 발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과 종교는 모두 인간에 관한 탐구 노력이다. 인문학이 사유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면, 종교는 신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문학을 향한 시발점이지만, 그것이 곧 인간의 이해는 아니다. 글쓰기는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문학은 기술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울림이 필요하다. 그 울림은 나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 나는 바로 진정성이다.

일례로 자서전은 타인에게는 나를 드러내는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지난 시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건 나름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내면적인 상처일수도, 신체적인 장애일 수도 또는 여러 가지가 조합된 복합적일 수도 있다.

물은 100도 돼야 끓는다

마라톤은 42.195㎞를 완주해야 하는 경기다. 42.195㎞는 누군가에게는 2시간대의 거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가 걸려도 쉬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지치고 힘겨운 긴 거리이기도 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는 인생은 계속되는 가난과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풍요로운 삶으로 즐겁다 못해 심심함까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의 연속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누구든 삶 속에서 한 번쯤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 영화사 월트 디즈니의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는 젊은 시절 그림을 그리며 기본적인 생계를 겨우겨우 이어가며 살았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 원고를 팔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다녔지만, 당시 신문사 편집자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당신은 재능이 없소! 단념하시오!”

하지만 디즈니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강렬한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거듭 거절을 당해도 체념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행사 광고 표지에 그림 그릴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수입은 적었지만 잠을 잘 장소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낡은 창고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생쥐 한 마리가 나왔다. 디즈니는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빵 조각을 떼어 주었다. 그리고 생쥐를 한번 그려보았다. 이 생쥐가 바로 지금 디즈니사의 대표 캐릭터가 된 유명한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다. 월트 디즈니가 가장 초라한 시절 자기가 거처하던 곳에 쥐까지 나왔던 비참한 순간을 도리어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만화 그리기라는 자기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는데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만화 그리기라는 자기 장점을 최대한 살려냈다. 고난과 절망을 극복하여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같다. 글쓰기엔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을 배신하는 속성이 들어있다. 글로 막상 써보면 쓰고 싶은 대로 써질 때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이 쓰려던 글보다 못한 글이 나온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자신이 쓰려던 글보다 더 나은 글이 나온다. 어느 쪽이든 써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계속 써볼 수밖에 없다.

물도 99도에서는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마지막 1도의 불꽃이 더 필요하다. 마지막 1%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서 100도가 되어야 한다. 열정을 다 쏟아부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의 온도도 100도 이상 높여서 사랑도 일도 열정으로 펄펄 끓게 만들어야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문경지방의 도공들은 가스 가마를 쓰지 않고 전통적인 장작 가마를 쓴다. 장작 가마 온도는 1300도로 올려야 한다. 소나무로 1300도를 만드는데 24시간 또는 72시간이 걸린다. 1300도가 되면 도자기를 만드는 흙과 물과 불이 조화가 되어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을 변요라고 한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진정한 명품 도자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