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묵죽후(題墨竹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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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묵죽후(題墨竹後)
  • 曠坡 先生
  • 승인 2024.02.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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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묵죽후(題墨竹後)

 

한여농필연(閑餘弄筆硯)/한가한 때 벼루의 먹을 찍어

사작일간죽(寫作一竿竹)/한줄기의 긴 대나무를 그렸다

시어벽상간(時於壁上看)/때때로 벽의 그림을 바라보니

유자고불속(幽姿故不俗)/그윽한 자태가 속되지 않구나

 

 

*마음의 여유

고려 때의 시인 정서(鄭敍)가 지은 시입니다. <정과정곡(鄭瓜亭曲)>으로도 유명한 이 시인은 어느 날 문득 묵죽화를 그려 벽에 붙여놓고 가끔 바라보며 <제묵죽후>라는 시를 읊은 모양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마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듯합니다. 잠시 잡다한 세상사를 잊고 그림 속의 신선이 되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탈속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제목 <제묵죽후>는 ‘먹으로 대나무 그림을 그려놓은 후 쓴 시’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속에서 시인 정서(鄭敍)의 ‘정서적(情緖的) 거리’가 느껴집니다. 그림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창밖의 풍경처럼 멀리 있는 것도 아닌, 적정거리의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 적정거리가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해줍니다.

문득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에서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김소월이 느끼는 ‘저만치’의 거리와 정서가 느끼는 벽과의 거리는 바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거리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