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중의 한(閨怨)
월루추진옥병공(月樓秋盡玉屛空)/달빛 누각 아래 가을 저물어 방안 옥 병풍 공허한데
상타로주하모홍(霜打蘆洲下暮鴻)/된서리 맞은 갈대밭 어두운 물가로 기러기 낮게 날고
요금일탄인불견(瑤琴一彈人不見)/거문고 한 가락 타보지만 듣는 이 하나 보이지 않네
우화령낙야당중(藕花零落野塘中)/연꽃만 하릴없이 뜰아래 연못으로 떨어지고 있누나

*깊은 가을 속의 외로움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홀로 안방에서 앉아 외로움을 칼질하고 있는 시입니다. 달빛 내리비치는 누각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타보지만 듣는 이 하나 없는데, 뜰아래 연꽃만 시나브로 지고 있습니다. 안방에 옥으로 수놓은 병풍이 있지만, 임이 없으니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에서는 깊은 가을에 여인의 한이 시린 갈대처럼 서걱대는 게 저절로 느껴집니다. 외로움은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그래서 된서리로 벼려놓은 칼처럼 예리한 갈대와 어둠의 허공을 가르는 기러기의 외로운 비상은 섬뜩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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