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명필의 값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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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명필의 값진 선물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3.11.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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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전래동화 이야기

 

학문이 깊은 선비 중에 마음이 아주 고결한데다 강직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한 명필이 있었습니다. 한때 벼슬살이를 한 적도 있지만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 글을 읽고 쓰고 짓는 일에만 힘썼습니다. 벼슬을 할 때도 청렴하여 재물을 모으지 않은 그였으니, 집에 들어앉은 이후로는 더욱 곤궁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필은 먹고사는 일로 걱정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다 떨어졌다고 아내가 울상을 지으면, 그때서야 지필묵을 들어 일필휘지로 글씨를 써주며 말했습니다.

“육의전 배주부를 찾아가 이것을 전해주시오.”

명필의 아내가 글씨를 쓴 종이를 말아들고 육의전으로 달려가면, 배주부는 그것을 받아놓고 짐꾼을 시켜 쌀이며 땔나무를 한 짐씩 지워 보내주는 것입니다.

육의전의 배주부는 지필묵 장사도 하고, 글씨며 그림이며 도자기 등 값진 골동품을 사서 모으기도 하는 장사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명필의 아내도 남편의 글씨가 꽤 값이 나간다는 것을 알고 문득 욕심이 생겼습니다. 매일 남편이 글씨를 써서 육의전 배주부에게 팔면 보다 나은 살림을 꾸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날 넌지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즘은 왜 도통 글씨를 쓰지 않으시나요?”

“허허, 글씨란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니고, 흥에 겨워야 써지는 것이라오.”

명필이 빙그레 웃으며 아내를 건너다보았습니다.

다시 조심스럽게 아내가 명필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흥이 나시는지요?”

“마음이 내켜야한다오.”

“마음이……?”

언뜻 아내는 명필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오. 그저 마음이 요물일 뿐이지.”

명필은 아내의 심중을 헤아리고도 남았지만, 모든 것을 마음의 탓으로 돌려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실상 명필은 아내의 살림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해주기 위하여 글씨를 열심히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씨를 자주 쓰면 돈은 벌 수 있겠으나 영혼이 가난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릇 영혼이 담긴 글씨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글씨를 쓰다보면 영혼이 담기지 않고 오히려 사악한 욕심이 담겨 글씨가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명필의 매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누이를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에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갔지만 가난했던 그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때만큼은 그도 마음이 잠시 흔들렸습니다.

누이네 집도 그리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양반집이었지만, 매부가 벼슬자리에서 일찍 물러난 후 가세가 기울어 장례조차 제대로 치루기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매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거의 1년이 되어갈 무렵, 명필은 문득 누이가 보고 싶은 생각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때마침 누이는 방안에서 비단 옷감을 펼쳐놓고 막 바느질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누님, 지금 뭘 하시오?”

명필이 열린 방문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오, 동생이 왔구먼! 아껴두던 비단 옷감인데, 이걸로 치마저고리를 만들려던 참이라네.”

누이의 말에 명필은 짐짓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허허! 누님도 호사를 즐길 줄 아시는 모양이구려!”

“내가 입으려는 게 아니라네. 곧 있으면 자네 매부 1주기가 다가오지 않는가?”

누이가 말하기 전에도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남편 1주기에 쓸 제물을 장만하려고 마지막 남은 비단 옷감으로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한다는 말에는 명필도 가슴이 찌르르 저려오는 것입니다.

“나 배가 고프니, 밥상 좀 봐주오.”

명필은 성큼 방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네? 내가 얼른 밥상을 차려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게.”

누이는 방안에 비단 옷감이 펼쳐진 것을 그대로 두고 얼른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비단 옷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필은, 그 비단의 희고 고운 결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매부가 쓰던 지필묵이 서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순간 글씨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 명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먹을 갈아 흰 비단 위에 일필휘지로 한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붓끝에서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으며, 글씨를 쓰는 쪽의 소맷자락에서 비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글씨를 다 쓰고 나서 명필이 이마의 땀을 닦을 때 밥상을 차려 들고 들어오던 누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니, 이 아까운 비단을!”

누이의 말에 명필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누님, 육의전 배주부를 찾아가 이 글씨를 보여주시오.”

그러더니 명필은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날 명필의 누이는 육의전으로 배주부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놀라운 솜씨로다!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군!”

누이가 동생의 이름을 대지 않았는데도, 배주부는 단번에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작품을 얻은 배주부는 새로운 옷감으로 치마저고리 열 벌은 만들 수 있는 좋은 비단과 쌀과 땔감까지 잔뜩 사서 짐꾼에게 지워 명필의 누이를 따라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별도로 돈 꾸러미도 보내어 그녀의 남편 1주기에 쓸 제물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예술가는 물욕을 부리면서부터 그 작품에서 영혼이 빠져나갑니다. 영혼이 들어있지 않은 예술작품은 향기가 없는 조화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이 숨 쉬는 예술작품에서는 작가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