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씨와 기른 곡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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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 씨와 기른 곡식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3.09.13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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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우리 전래동화

 

한동네에서 태어나 절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도 아래윗집에 살며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두 친구 중 김씨는 아들을 셋씩이나 낳아 자식 복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박씨는 친구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였으나, 오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박씨는 무척이나 부러운 눈으로 김씨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참 복도 많구먼. 아들을 삼형제씩이나 뒀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여보게 자네도 조금만 기다리면 곧 소식이 있을 것이네. 만약에 자네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면, 다음에 내가 낳는 자식은 자네에게 주겠네.”

김씨가 말했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내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자네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에게서 그런 허락을 받아냈네. 우린 성씨가 다르긴 하지만 친형제나 다름없지 않은가? 같은 성씨끼리는 양자도 보내고 그러는 게 관례이니, 우리가 비록 성씨가 다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흉이 될 일은 아니라고 보네.”

김씨의 말에 박씨는 눈물겹도록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 아내가 또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이때 박씨의 아내도 일부러 배에 천을 둘러 날이 갈수록 아이가 크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김씨와 박씨 부부끼리만 비밀로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열 달을 채워 김씨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즉시 박씨네 집으로 아이를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김씨의 아내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은 유산을 했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자, 우리 이 비밀을 저승까지 가지고 가세나. 물론 저 아이가 커서도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기로 하세.”

김씨 부부와 박씨 부부는 이렇게 굳은 약속을 하였습니다.

김씨의 아들 삼형제와 박씨의 외아들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런데 김씨의 아들 삼형제는 자라날수록 개구쟁이가 되어 매일 말썽만 피웠습니다. 반면에 박씨의 외아들은 머리가 총명하여 글공부도 잘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잘 모셨습니다.

아들 삼형제는 말썽만 피우는 게 아니라 다 커서는 가산까지 탕진하여 김씨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씨는 열심히 일을 하여 재산을 모으고, 그 재산으로 외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쳤습니다.

박씨의 외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큰 벼슬자리를 얻고, 정승의 딸과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김씨는 은근히 박씨를 부러워하게 되었고, 갓난아이 때 준 아들을 되찾아오고 싶었습니다.

“저 녀석은 내 아들인데, 친부모를 몰라보는구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다 크면 제 부모를 찾는 법 아니겠는가?”

김씨의 말에 박씨는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여보게, 저 아이 낳을 때 약속하지 않았나? 자네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저 아이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저승까지 가지고 가자고 말일세.”

“그래도 낳아준 공이 있는데, 과거급제까지 하고 나서 모른 척하면 안 되지.”

김씨는 ‘어흠!’하고 크게 기침을 한 후 돌아갔습니다.

그날 이후 박씨는 앓아누웠습니다.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굳게 약속한 것은 틀림없지만, 낳은 부모가 저렇게 나오는데 기른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씨가 이유도 없이 머리를 싸맨 채 드러눕자, 외아들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습니다.

“아버님, 무슨 큰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크게 꾸짖어주십시오.”

효성이 지극한 외아들은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박씨는 더는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아들에게 이제까지 숨겨온 출생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지금 먼저 네 친부모가 누구인지 말은 못하겠다. 다만 친부모가 너를 찾겠다고 하니, 이제 나는 네 의견에 따르도록 하마.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네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다 말해주겠다.”

박씨의 말에 외아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한 가지 묘책이 있으니 아버님은 우리 고을의 친구들을 모두 불러주십시오. 때마침 아버님의 생신도 되었으니, 아버님 친구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겠습니다.”

외아들의 말에 박씨는 친구의 부부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잔칫상을 받은 자리에서 박씨의 외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자기 밭에 씨앗을 뿌렸는데, 때마침 바람이 몹시 불어 그 씨앗 중의 일부가 이웃집 밭에 떨어졌습니다. 이웃집 농부는 씨앗에서 싹이 나자 뽑아버리기가 아까워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래서 가을에 수확을 하게 되었는데, 봄에 씨앗을 뿌린 농부가 이웃집 밭주인에게 수확한 곡식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수확한 곡식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씨를 뿌린 농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정성들여 키운 이웃집 밭주인의 것일까요?”

잔칫상에 둘러앉은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보다, 그것을 정성껏 키운 사람의 곡식이 맞네.”

그 자리에는 물론 박씨의 외아들을 낳은 김씨 부부도 와 있었습니다.

김씨는 그때서야 박씨의 외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그 아들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밝히겠다는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박씨의 외아들도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낳은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양가의 부모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끈끈하게 연결고리를 맺어줄 때 친구가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 자식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 피를 나눈 낳은 정이지만, 기른 정도 그에 못지않은 끈끈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