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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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예현숙 박사
  • 승인 2023.08.2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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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사, 박사

 

 

내 고향은 수원이다. 지난 토요일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수원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모처럼 만나는 친척과 지인들의 얼굴을 보는 게 반가웠다. 5년여 만에 만난 한 지인 부부는 예식만 참석하고 점심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다. 아내는 남아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여유를 누리려 했지만, 남편이 무슨 이유인지 한사코 그냥 가겠다고 해서 함께 돌아갔다.

 

부부간의 배려는 필수사항

그냥 돌아가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지인에게 아쉬운 마음의 안부 문자를 보냈다. 지인의 아내에게서 답글이 곧 왔다. 그 글에는 남편에게 느꼈던 아쉬움 정도가 아닌 힘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그 집 남편은 저혈당이 와서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했단다. 물론 그 남편의 말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아내에 대한 배려가 없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꼭 그렇게 돌아가야 했다면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가 아닌 그 남편이 그랬을 리가 희박하다.

그 지인의 아내가 걱정되었다. 오랜만의 나들이임에도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마다하고, 도망가듯이 돌아가자는 남편의 행동이 그 아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사실 아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 그 건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와 비슷한 패턴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아내는 그때마다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힘들어했었을 것이 짐작이 간다. 이제는 평정심을 찾았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태도로 인해서 불행을 더 크게 느끼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상대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는 건 독선일 수 있다

일차적으로 남편이 아내에 대한 배려심이 없었던 게 화근이다. 한편 아내도 왜 남편이 그토록 빨리 돌아가야만 했는지 그의 사정과 마음을 헤아려 보는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내에게서도 남편을 향한 그런 배려가 없었던 듯이 보인다. 내 관점으로 바라본 남편은 불만이었고, 이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고 본다.

우리는 다분히 내 관점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나의 행과 불행을 규정하기 쉽다. 상대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를 재는 잣대에는 나의 관점과 나의 기준이 담긴 눈금만 그려져 있다. 내 관점은 그래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걸핏하면 그 잣대에 의해서 오해가 발생하고, 나와 달라서 오는 고통이 아주 크게 다가온다. 한때 매력이 있었고, 좋아했고, 열렬히 사랑했었던 건 서로 달라서였건만 우리는 이 진실을 놓치고 산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원만해지는 대신, 그 ‘다름’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많다. 흔히 이혼 사유에 ‘성격이 달라서’가 있는 까닭이다.

 

미운 짓만 골라 하는 당신은 내 관점의 산물

‘다름’이 얼마나 부부 관계를 보완해주는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잊고 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살이를 비롯하여, 배우자에 대해서도 점점 알아 갈 것들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미숙한 것들을 배워나가면서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부족하고, 미숙한 것들을 도우며 성장해 나가야 하건만 내 관점 안에 갇히게 되면, 같이 성장해 나갈 배우자는 없고, 온통 상대하지 못할 대상만 남을 수 있게 된다. 점점 배려하기 싫어지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이 멀어지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강도짓을 한다. 그는 행인들을 붙잡아 자기 침대에 눕혀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의 사지를 늘이거나 사지를 그냥 잘라낸다. 이 비유는 흔히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라고 불리며, 모든 것을 자기 생각에 맞춰 상대를 재단하는 완벽주의자를 상징한다. 자기 관점 안에 갇혀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여긴다면 독선을 보여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행위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관점에서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미운 짓만 보이게 되어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당신은 내 관점의 산물일 수 있다.

내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 내 시선의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서는 일이 시급하지 아니한가. 나의 행복은 부부의 행복을 낳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