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과 거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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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과 거지의 운명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3.06.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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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우리 전래 동화

 

옛날 조선시대의 임금님들은 곧잘 서민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민간인 복장을 하고 궁궐 밖으로 외출을 하곤 하였습니다.

장난을 좋아하던 한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민간 시찰을 나갔습니다. 임금님은 허름한 민간인 복장이었고, 시종은 일부러 양반 복장으로 꾸몄습니다.

임금님은 허름한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거 동대문 밖에 매일 쪼그리고 앉아 점을 치는 노인이 있는데 아주 용하다더군. 천자문 책을 놓고 점을 보는데 아주 족집게라는 게야.”

수염이 흰 노인 하나가 마주앉은 노인에게 말하였습니다.

“하필이면 왜 천자문인고?”

“낸들 아나? 천자문 책을 이리저리 펼치며 글자 하나만 찍으라는 거여. 그래서 어떤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글자를 풀어 운명을 맞춘다는 게야.”

“아니, 우리 같은 까막눈은 그 점쟁이한테 운수 한번 못 보겠군.”

“까막눈도 상관없다는 거여. 그저 아무 글자나 가리키면 되니까.”

두 노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임금님은 자신도 한 번 그 점쟁이를 찾아가 운수를 보고 싶었습니다.

“노인장, 그 점쟁이가 그렇게 용하단 말입니까?”

임금님이 흰 수염의 노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헙디다.”

“그곳이 어딘지 자세히 좀 가르쳐주십시오.”

임금님은 그 노인으로부터 점쟁이가 있다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사실 임금님은 어려서부터 궁궐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몸이라 함부로 궁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이 되어서야 궁궐 밖에 나와 민정 시찰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도 발길 닿는 대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종과 함께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면서 임금님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웅장한 궁궐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마음껏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지만, 사실 임금님이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은 일반 백성들보다 더 괴로운 일만 많을 뿐이었습니다.

도무지 임금의 생활이란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편 가르기를 하여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말싸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날마다 날아드는 상소는 불만의 소리로 가득한 백성들의 원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가뭄이 들어서 논밭의 곡식이 말라죽어도 임금님 탓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임금님은 점쟁이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흰 수염의 노인이 말한 대로 그 점쟁이는 거적 위에 천자문 책을 펼쳐 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운수 좀 봐주시오.”

임금님은 점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 그럽시다.”

눈을 번쩍 뜬 점쟁이는 입가에 흐르던 침을 손등으로 쓰윽 문질러 닦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임금님이 물었습니다.

“거, 천자문 책에서 아무 글자나 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보슈.”

점쟁이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천자문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위 상(上) 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담배를 몇 모금 빨며 딴청을 하고 있던 점쟁이는 임금님이 가리키는 글자를 바라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습니다.

“아이고, 상감마마!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점쟁이는 이렇게 말하며 임금님에게 큰 절을 올렸습니다.

임금님도 놀라고 옆에 있던 시종도 놀랐습니다.

“에이, 여보쇼! 내 꼴을 보면 모르우? 난 왕십리 사는 김가라오.”

임금님은 점쟁이가 어찌 나오나 보기 위하여 이렇게 둘러댔습니다.

“상감마마! 어찌하여 소생을 이리 놀리시옵니까? 미리 알아보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점쟁이는 엎드린 자세에서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용한 점쟁이요.”

임금님은 시종에게 후한 복채를 내놓게 하였습니다.

다시 임금님은 시종을 데리고 거지들이 사는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마침 한 거지가 양지쪽에 거적을 깔고 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두 다리와 양팔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잠자는 거지의 그 모습이, 임금님은 부러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빌어먹는 거지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을까?”

임금님은 시종에게 그 거지를 흔들어 깨우게 하였습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거지가 퉁방울 같은 눈으로 임금님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물었습니다.

“그래, 이런 데서 잠이 잘 옵니까?”

“원, 나는 또 뭐라고. 아 거지 팔자가 상팔자라 안 합디까? 동냥 얻어다 밥 배불리 먹었겠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 낮잠이나 자는 수밖에.”

거지는 그러더니 다시 거적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게 해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할 테니 나를 따라가지 않겠소?”

임금님의 말에 거지는 퉁방울 같은 눈을 꿈쩍거렸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지옥이라도 따라가지.”

이렇게 해서 임금님은 거지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거지는 자신을 궁궐로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 임금님인 것을 알고 너무 놀라 사지를 벌벌 떨었습니다.

“너무 놀랄 것 없습니다. 그대는 이 궁궐에서 마음껏 먹고 마음껏 놀아도 좋습니다. 대신에 이제부터는 궁중 예법을 익히도록 하여라.”

임금님은 시종을 시켜 거지에게 궁중 예법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고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 것은 좋은데, 궁중 예법을 익히는 것만은 죽기보다 더 싫었습니다.

어느 날 거지는 임금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는 다시 궁궐 밖 거지들이 모여 사는 다리 밑으로 가겠습니다. 저 같은 거지에게는 이 궁궐보다 거기가 더 편하니까요.”

임금님은 그런 거지를 보며 쯧쯧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사람의 운명이란 타고나는 모양이로구나.”

임금님은 거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때 임금님은 시종에게 시켜 동대문 밖 점쟁이를 시험해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에게 좋은 옷을 입혀 점을 보게 한 것입니다.

시종은 거지를 데리고 동대문 밖으로 갔습니다. 천자문 책을 펴놓은 점쟁이가 그 두 사람을 맞았습니다.

“이 천자문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자 하나를 짚어보시오.”

점쟁이가 좋은 옷을 입은 거지를 보며 말했습니다.

거지는 미리 시종이 시킨 대로 천자문 책을 뒤적이다가 글자 하나를 짚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위 상(上) 자를 짚는다는 것이 거꾸로 아래 하(下) 자를 짚고 말았습니다.

“예끼 이놈! 지금 감히 누굴 놀리는 거냐? 평생 거지 신세를 못 면할 놈이 어디 와서 나를 시험하느냐? 썩 물러가거라!”

점쟁이는 거지의 멱살을 잡으며 마구 호통을 쳐댔습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거지가 뻗대며 대어들었습니다.

“이놈아! 여기 이 아래 하 자에 달린 점이 뭔 줄 아냐? 그게 바로 깡통이다, 깡통! 깡통 옆구리에 차고 평생 빌어먹을 놈이 바로 네놈 팔자여!”

화가 난 거지는 좋은 옷을 훌훌 벗어던진 채 거지들의 소굴인 다리 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시종은 임금님에게 거지가 점을 본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 참 용한 점쟁이로다. 그리고 그 거지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위인이로구나!”

임금님은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분별이 있습니다. 거지는 배만 부르면 행복하지만, 임금님은 늘 산해진미를 먹어도 오히려 근심이 더 많습니다. 행복은 원래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