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상태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권용철 작가
  • 승인 2019.11.07 12: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를 감동시킨 한권의 책

 

전쟁은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하는가? 전쟁은 승리와 패배로 종결되지만 이긴 자나 진 자나 모두에게 처절함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긴다. 국가라는 허망의 대의명분 속에 개인의 삶은 철저히 파괴된다. 장군의 역사는 있지만, 병사의 사연은 없다.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대의명분이나 전리품에 대한 환호가 아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목숨보다 앞서는 명분은 없으며 목숨을 버려서까지 쟁취해야 할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러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내용이다. 전쟁이 가져오는 엄청난 비극과 고통을 전장이라는 삶의 현장 속에서 여성들이 겪었던 극한의 이야기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영웅 남자들의 시선이 아니라 일상의 전장에서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통해서다. 20세기 초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광풍이 휩쓸던 구소련에서 조국의 이름이 곧 내 삶의 의미가 되던 시절 러시아 소녀들은 조국을 위해 자원입대에 줄을 선다. 혹여 후방의 간호병이나 지원병에 배치되면 전선에서 싸우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애국심’이 끓어오른다. 국가의 의미가 나의 존재 의미가 되던 시절, 러시아의 소녀들은 국가의 슬로건을 내 인생의 슬로건으로 생각한다. ‘조국이 그대를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등 군국주의 구호들이 사람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전장에서 행복이란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

전쟁의 현장은 참혹했다. 16~7세의 꽃다운 소녀들은 자신들의 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전장에서 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죽어간다. 적으로 만난 독일군 포로에게서 인간의 정을 느끼고 들판에 흐드러진 들꽃 한 송이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간호병으로 일했던 한 소녀는 ‘전장에서 행복이란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의 일상화 속에서 살아간다. 4년여에 걸친 전장에서 그들은 죽어갔고 살아남아서도 황폐해진다.

전쟁이 몰고 온 전후의 현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전쟁은 끝난 후의 광기가 사람들을 더 심한 야만으로 몰고 간다.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의 ‘우리에게 포로는 없다. 배신자만 있을 뿐’이라는 말 한마디에 포로로 잡힌 게 죄가 되고 집안 전체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전쟁보다 더한 삶 속으로 빠져든다. 그들은 절규한다. “이제는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죄 없는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내 인생은 어디 있는가?”

지금은 할머니가 된 한 참전 소녀는 전쟁이 끝난 후의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의 증오는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미워했다. 심장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다.” 인간 심리의 아이러니도 드러난다. 아빠와 오빠를 전쟁에서 잃은 소녀는 집회장에서 만난 스탈린의 모습에 열광한다. 눈에서 왈칵 감격의 눈물을 쏟아낸다. 도대체 인간이란 동물은 어떤 존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여성에 대한 모욕은 인간 본성의 극한을 보게 된다. 몸을 더럽힌 여자,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란 말인가. 병자호란 때의 환향년이라는 말을 생각게 한다. 인간의 행태는 지구 어디에서든 이렇게 동일한 유전자의 행태를 보인다. 남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죄 없는 여자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전쟁의 역사는 추악한 남자들의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톨스토이는 말한다. “어째서 인간은 전쟁 없이 살지 못하는가? 나는 도저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 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전쟁은 우리가 모두 지나치게 게으르고 지나치게 안이하고 지나치게 비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무수한 인터뷰를 통해 전쟁을 알게 된 저자도 말한다. “전쟁은 인류 역사의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유사 이래 끊이지 않던 전쟁은 마침내 전쟁에 대한 최고의 명언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다.”

책의 끝부분 옮긴이의 말이 이 책의 독후감을 대신해준다.

“우리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눈감아버리는 비겁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늘 깨어있도록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책을 읽고 나면 책 제목대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남자의 얼굴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