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왜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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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왜 쓰는 걸까?
  • 지호원 작가
  • 승인 2020.04.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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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원 작가의 글쓰기 강좌(21)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이 말을 심리적으로 인정하기까지 나는 최소 55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가능한 그런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끝자리는 언제나 다시 혼자였다. 아무리 편안하고 재미있고 즐거운 자리라 해도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혼자라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삶의 경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각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므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대도 듣는 사람이 내 상황과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그건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 내 마음 모두를 알 수는 없다.

요즘 같이 경쟁이 치열해진 세상에서는 이런 상황은 비단 중년 이상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이를 떠나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이 마음을 무시로 외롭게 만든다. 그 외로움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글쓰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글쓰기는 살아가며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성의 힘이고, 느낀다는 것은 감성의 발원이다. 흔히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독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서란 나와 삶의 경험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인생 가치관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읽고, 그의 상상력에 빠져드는 일이다.

글쓰기는 욕망의 발현 - 조지 오웰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가? 환경을 떠나 나이를 떠나 살아온 이력을 떠나서 지금 내게도 분명 생각은 존재한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봤던 풍경,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누군가에 들은 공감되는 이야기, 저녁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 주말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하다 나눴던 말 속에서 느낀 세대 차이 등등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관심을 기울이면 내가 쓸 이야기들은 정말 많다.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 걸까? ‘1984’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조지 오웰은 ‘글쓰기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표현했다. 욕망(慾望)은 한자로 욕심‘욕’ 자에다 바랄 ‘망’자를 쓴다.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욕심을 바란다는 뜻이다. ‘욕심을 바란다!’ 어째 표현이 좀 이상하다. 우리 귀에 익숙하고 자주 쓰는 ‘욕심을 부린다!’고 표현을 바꿔보자.

무엇에 대한 욕심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나 역시 잘 모른다. 그저 글쓰기는 욕망의 발현, 조지 오웰의 말을 떠올리자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이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라는 문학작품 제목만 기억날 뿐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기준의 하나는 욕망의 다양성이다. 그 다양한 욕망을 일일이 거론할 수도 쉬 구분할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인생이라는 것은 환경에 따라 나이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각기 다르지만, 욕망의 지속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욕망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상징되는 것은 권력과 돈에 대한 집착이다. 권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형제와 부모·자식 간에도 칼을 들이대는 예는 세계 역사에서 아주 흔한 기록들이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남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사례는 얼마나 더 흔하고 흔한 일들인가.

조지 오웰이 말한 ‘글쓰기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뜻은 아마도 인간의 그 다양한 욕망 중에서 남이 아닌 나에 대한 내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일, 곧 문자화하고자 하고 싶은 욕심이 아닌가 싶다.

글쓰기는 닫힌 마음을 열어가는  행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물의 끓는 온도는 100℃다. 이는 삼국시대나 조선 시대나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질량보존의 법칙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그 마음은 여리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며, 때로는 수줍기도 하고 때로는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 있어 무섭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그런 ‘마음을 열어가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건 나름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내면적인 상처일수도, 신체적인 장애일 수도 또는 여러 가지가 조합된 복합적 일수도 있다. 글쓰기는 그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일이며, 내 안에 갇혀있던 마음, 스스로 가두었던 마음, 이런 저런 상처로 인해 갇혀진 마음,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닫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마치 상처 입은 동물들이 자신의 혀로 상처를 핥는 것처럼, 글쓰기는 인간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본능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글쓰기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예술적 수준에 도달하면 문학이 된다.

여기서 글쓰기와 문학의 차이를 굳이 하나 말한다면 글쓰기는 문학을 향한 시발점이지만, 그것이 곧 인간의 이해는 아니다. 글쓰기는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문학은 기술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울림이 필요하다. 그 울림은 나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그 나는 바로 진정성이다. 이런 문학을 향한 첫걸음이 글쓰기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글쓰기는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 깊이가 깊고 넓으며 다변적이다. 그 때문에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마음을 바라보는 통찰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인간사회에서 인문학과 종교가 발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과 종교는 모두 인간에 관한 탐구 노력이다.

인문학이 사유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면, 종교는 신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다.

참고로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2017년 11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글쓰기의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글쓰기의 효과를 다섯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 삶을 보존합니다. 내 삶이 기록으로 남죠. 둘째로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과거 내가 나쁜 일을 겪었더라도, 글로써 이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찰의 계기가 됩니다. 우리 누구나 당시에는 의미를 몰랐으나, 돌이켜 보면 내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내 삶을 반추하는 행위입니다. 넷째로 글쓰기를 통해 현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 창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의미는 다른 누군가가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글로 내 삶을 정리하고, 다른 이의 경험과 내 경험을 비교하면 나만의 독특함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보다 변하는 것이 더 많은 세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 변화 속에서 뒤처지고, 잊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모를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외로움이 스며들고 있다면 컴퓨터를 켜고, 아니면 노트를 꺼내 지금 심정을 글로 써보자. 그 순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친한 친구가 생기는 것이다.

추신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