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만세동이’ 조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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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만세동이’ 조애실
  • 신영란 작가
  • 승인 2020.02.0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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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독서회를 이끌며 청년계몽운동 펼쳐

 

 

이 한 알의 약에다 당신의

피 묻은 자비의 손 얹으사

효험을 주옵소서

1998년 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애국지사 시인 조애실 여사’라는 제목의 부고가 실렸다. 향년 77세. 이로써 1941년 ‘아오지탄광사건’으로 한 차례, 1943년 비밀 독서회 운동으로 또 한 차례 옥고를 치른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더불어 가혹한 고통도 종지부를 찍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육신을 안고 사느니 영원히 잠들기를 바라며 쓴 위의 시는 일종의 절명시(絶命詩)에 가깝다.

함경북도 길주 태생인 그녀가 서슬 푸른 일제 말기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1919년 3월 길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17세 소녀가 조애실의 어머니 김영순이었다.

시위가 벌어지자 일본 경찰은 소방 호스에 붉은 물감을 섞어 군중을 향해 마구 뿌렸다. 그런 뒤 마을을 수색하여 어느 집에서든 붉은 물감이 묻은 옷이 나오면 이유를 묻지도 않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김영순은 권총을 발사하며 뒤쫓는 헌병을 겨우 피해 어느 여관 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급한 대로 붉은 물감이 번진 저고리를 뒤집어 입고는 마구간에 있던 말을 타고 산 너머 이웃 마을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녀의 행색에 겁을 먹은 이웃들은 물론 친척들조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 집안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딸이 돌아오질 않자 김영순의 어머니는 마을에 방을 붙였다.

‘딸을 찾아주는 이가 총각이면 지체 고하에 상관없이 혼인을 시킬 것이요, 유부남이라면 재산의 절반을 내놓을 것이다.’

야산에서 빈사 상태로 쓰러져 있던 딸을 업고 나타난 사람은 여관집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약속대로 김영순을 그에게 시집보냈고 이듬해인 1920년 겨울 조애실이 태어났다.

*아오지탄광사건

조애실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를 닮아 열정적인 기질을 지닌 그녀는 주로 조선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 1940년 3월, 아오지행 열차에서 내린 수백여 명의 이주민들과 마주친 스무 살 처녀 조애실은 충격에 휩싸였다. 외투 하나 변변히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이불 보따리 하나 달랑 짊어지고 겨울이 춥기로 유명한 함경도 산길을 꾸역꾸역 걸어가고 있었다. 완장 찬 사내들은 저희끼리만 밥을 먹고 배고픔을 호소하는 이주민들에겐 삽자루를 휘둘렀다.

조애실은 탄광 지역으로 들어가 야학을 일으켰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이주민들에게 금지된 한글을 가르치며 역사책을 읽게 했다. 그러다 일제에 발각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매질을 당했다.

유치장 안에는 날파리가 득실거렸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오염된 식수를 마시고 설사병에 걸렸다. 숨만 붙어 있는 채 널브러진 그녀를 보고 놀란 형사들은 전염병이라도 옮을까 겁을 먹고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운명을 가른 한 줄의 낙서

일경의 감시를 피해 서울로 도망친 조애실은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비밀 독서회를 이끌며 청년 계몽운동을 펼쳤다.

‘삼융칠월이화락(三隆七月梨花落) 육대구월해운개(六大九月海雲開)

-융희 3년 7월 배꽃이 떨어지고, 6월 큰달이 6년이면 9월 바다에 안개가 걷힌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1944년 10월, 책갈피에 끼워진 <정감록>의 한 구절이 원주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손에 들어갔다. 융희는 대한제국 마지막 연호,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한 때가 융희 3년 7월, 배꽃은 조선 왕실을 상징한다.

“올해는 6월 큰달이 연달아 6년째 되는 해, 이제 곧 음력 9월이니 일본이 해전에서 패하고 망할 것이다!”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쉬쉬하며 돌던 소문은 미군이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를 괴멸시키자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간 그녀는 고문이 시작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이틀 전 독서모임에서 토론 주제로 삼은 책이 여운형, 이상재, 조만식, 안창호 등의 민족의식을 담은 논문 잡지 <학해(學海>였다. 한 회원이 독서클럽 가입을 원하는 친구에게 읽히겠다며 빌려 간 이 책에 정감록의 글귀를 적은 쪽지가 들어 있는 것도, 회원의 친구 오빠가 원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였다.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장장 81일 동안 악랄한 고문을 가했다.

-옷을 입고 고문을 당해도 분한데 갓 스물이 조금 넘은 박 속 같은 알몸을 불구 대천지 놈들 앞에서 드러낸 자체만도 입술을 깨물고 죽고 싶은 치욕이었다.-

조애실은 자신의 수상집을 통해 당시를 회고하며 조선인 형사 두 명이 제일 악독했다고 적었다. 한 명은 도꾸야마 박, 다른 한 명은 가네무라 김으로 통했다.

그녀가 보기에 도꾸야마는 실성한 사람 같았다. 고문으로 뼈 마디마디가 어긋난 그녀를 ‘잠수함’에 태운다고 가죽조끼를 입혀 욕조로 밀어 넣을 땐 악마가 따로 없었다. 독서회 회원 명단을 대지 않으면 뚜껑을 덮어버리겠다고 위협해도 끝내 입을 열지 않자 기어코 두 명이 뚜껑을 깔고 앉아 기절시키곤 인공호흡으로 깨워 다시 고문을 가하곤 했다. 감옥에 도로 집어넣을 땐 걷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어가며 이렇게 물었다.

“왜 절어?”

검찰에 이감되던 날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가네무라에게 이끌려 독립문 앞을 걸어가던 조애실은 어린 시절 눈길을 걸어 외갓집에 갈 때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엄마, 설상행보(雪上行步)는 와우성(蛙雨聲)이라지요…….”

‘눈 위를 걸으면 비 오는 날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뜻이다. 옆에 있던 가네무라가 이 말을 듣고는 선심을 쓰듯 가끔 책을 차입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걸작이었다.

“나도 실은 문학을 하는데…….”

가네무라 김, 그는 바로 ‘반달’의 작사가 윤극영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아동 문학가로 알려진 서대문경찰서의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김영일이다.

1945년 4월 26일, 조애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형을 받고 경성보호관찰소에 수용되었으나 단 며칠도 버티기 힘들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다. 보호관찰소 측은 고향에서 병을 치료하고 돌아와 재입소하도록 했다. 하지만 잠깐의 요양으로 나아질 병이 아니었다. 8월 초 다시 서울로 불려온 조애실은 병세가 재발하여 입원한 지 사흘 만에 해방을 맞는다.

심장과 폐까지 상하게 만든 고문의 후유증은 죽는 날까지 그녀를 따라다녔다. 의지만으로는 지탱하기 힘든 삶을 스스로 끝내려 치사량의 약물을 품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까.

정부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조애실과 어머니 김영순 여사 –사진 출처, 3,1여성동지회
조애실과 어머니 김영순 여사 –사진 출처, 3,1여성동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