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려면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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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
  • 지호원 작가
  • 승인 2020.01.2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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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원의 글쓰기 강좌⑬

 

작가 강창래는 글쓰기에 대해 언급하며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나이 육십을 넘기고서야 글자를 익힌 분이 쓴 일기와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옥남 할머니가 쓴 일기다. 이 분은 글자를 모를 때도 글을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60이 넘어 마침내 글을 배우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삼십 년 넘게, 아흔일곱이 된 지금도 쓴다고 한다. 누가 읽어 봐주든, 알아봐 주든 말든 상관없이 쓰는 게 재미있어서. 그 분이 쓴 일기를 읽어보자

 

꿈에 본 것 같구나

큰딸이 온다기에 줄려고 개울 건너가서 원추리를 되렸다.

칼로 되리는데 비둘기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괜히 내 마음이 처량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네.

그래도 원추리나물을 뜯어가지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아래 밭에 가서 두엄을 폈다. 두엄을 펴면서 집을 바라보니

누가 집으로 들어가기에 큰딸이 온 것 같애서 얼른 일어서서

집으로 오는데 진짜 딸이 왔네. 정말 반가웠지.

그런데 금방 가니 꿈에 본 것 같구나.

-이옥남 지음 “아흔일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양철북, 2019년, 28쪽

 

일기가 마치 시 같다. 이옥남 할머니는 글자를 몰랐기에 아마도 평생 종이책은 거의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글을 아주 잘 쓴다. 이는 살아오면서 종이책보다는 사람책을 꽤 많이 읽은 덕분이다. 사람책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배우던 못 배우던 간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상황을 접하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고 글자를 배운 뒤에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글을 잘 쓰려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간절한 마음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글쓰기에 익숙한 젊은 작가의 자기 고백적인 소설을 한번 보자

 

“이야기를 짓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고루 살피며 문장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소박하게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건데 막상 쓰다 보니 더 재밌게, 또 맛깔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글쓰기는 매순간이 결정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야기는 중간 중간 자주 멈췄다. 그럴 때면 홀로 북극에 버려진 펭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묻고 또 묻고, 한 번 더 해 달라 졸라댔다....... ”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2011년, 창비, 89쪽

 

이는 그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써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잘 안 되더라는 이야기다. 정말 그렇다. 글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잘 아는 이야기도 써내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글은 말과 달라서 그렇다. 우리는 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글로 쓰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글쓰기 방법에 있어 흔히 ‘말하듯이 쓰면 된다’는 말은 사실 그리 쉬운 방법은 아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글 쓰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니 쓰는 게 어렵고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대개 글쓰기가 어려운데 가장 큰 이유는 ‘아는 게 너무 적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아는 게 많아지면 글쓰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부모에게 ‘묻고 또 묻고, 또 한 번 더 해달라고 졸라댔다’고 한다. 많이 쓰다 보면 그게 무엇이든 잘 알아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들면 조금 다르다. 자기 이야기를 웬만큼은 풀어낼 수 있다.

예를 보자. 이 글 역시 평생 글자를 모르고 살다가 아마 칠십쯤 되어서 쓰기를 배웠고, 배운 다음 그리 오래지 않아서 쓴 글이다.

“ 그 해 내 나이 열여덟이었지. 음력 시월 스무아홉날, 아래채 지붕 인다고 쌀밥하고 차조밥하고 두 솥을 하는데, 너희들 큰엄마 두 분은 광목 한 필 삶아서 샘에 씻으러 가고 나한테는 점심 하라고 하더군. 나는 점심 늦을까봐 정신없이 서둘렀지. 쌀밥은 해놓고 차조밥을 하는데 분수가 없어서 물이 넘도록 불을 때는데 밥 타는 냄새만 나고 넘지를 안 하더군. 솥뚜껑을 열어 보니 위에는 생쌀이고 밑에는 타더군. 할머님은 방에서 점심 다 돼 가느냐고 야단하시고 천지가 아득한 게 내가 살면 무엇 하나 목이라도 매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 ”

어떤가?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지 않은가? 이제 막 글자를 배운 분이 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쓴 글이다. 이 글이 무척이나 세련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짐작이지만 이 이야기는 글로 쓰기 전에도 기회만 생기면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다 보면 내용이 잘 정리되어 다듬어질 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그 내용을 더 잘 알게 된다. 피드백이 되는 것이다.

작가 이만교는 페이스북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자기 삶을 사실대로 회고(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말썽꾸러기 둘째 아들로 자랐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주변 솔숲과 밤별이 모두 제 것이었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아무런 문화 혜택도 못 받고 자랐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든 얼마든지 다른 생각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자신의 과거란, 사실이 아니라, 그 시절 문장능력으로 만든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실’대로 기억한다는 건, 어린 시절의 생각문장으로 만든 비좁은 ‘해석’을 그대로 반복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다 더 나은 생각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 사용한 생각문장과는 다른 생각문장으로 자신의 과거를 창작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과거마저 얼마든지 새로 창작할 수 있다. 현재와 미래는 말해 무엇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