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
상태바
글쓰기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
  • 지호원 작가
  • 승인 2020.01.14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호원의 글쓰기 강좌⑫

 

 

글을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뭘 써야 하는 거지? ”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이것저것 끄적여보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다시 지워버린다.

그럼 갑자기 텅 빈 화면이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10분, 20분이 지나면 의욕은 식고 짜증만 밀려온다.

“ 아, 도대체 뭘 써야지, 뭘 써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

글쓰기를 처음 할 때는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럴 때 해결방법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 문장을 기억난다! 라고 적고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기억이 나는 것들을 두서없이 써보는 것이다.

이때는 문장을 잘 쓰려고 하면 안 된다. 그냥 메모하듯 적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중요한 기억이나 아주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그걸 구체적으로 적어간다.

5분 전에 있었던 일이건 5년 전에 있었던 일이건 관계없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모든 것이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막히면 다시 ‘기억난다’로 돌아가서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아주 좋아했던 일,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순간까지 이렇게 기억을 확장하고 메모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생각의 모양이 나타난다.

이래도 만약 기억도 나지 않고 쓸 이야기가 없다면 오늘 아침 잠에서 깬 이후부터 일과를 써보자. 만약 꿈을 꾸었다면 어떤 꿈을 꾸다 잠에서 깼는지, 아침은 뭘 먹고, TV나 라디오에서 어떤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인상이 남았는지, 약속이 있어 집을 나섰는데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든지, 바람이 불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든지, 또는 길을 걷다가도 가족 중 누군가가 짜증을 내고 나갔는데 이유를 알거나 잘 몰라서 마음이 쓰였다든지 하는 기억과 생각들을 적어가는 것이다.

이때 역시 중요한 것은 잘 쓰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잘 쓰려는 순간, 기억이나 생각의 흐름이 끊길 수 있다. 마치 외출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소변이나 대변이 급해 집에 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듯, 지금 생각나는 기억이나 마음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시간 기억나는 것들을 적은 다음 그것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마치 천 조각 하나하나를 잇대어 밥상보나 식탁보를 만들 듯, 어떤 내용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라는 실로 꿰매 보는 것이다.

모양 있게 잘 꿰맸는지, 아니면 꿰매긴 했는데 모양이 없어 마음에 안 들었다는지 하는 것은 두 번째 일이고 일단 모양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때 학습(學習)한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학’은 지식이나 정보를 배우는 명시적 지식이며 ‘습(習 익힐 습)’은 그 내용을 몸으로 직접 익히는 내재적 지식이다. 결국, 지식이나 정보를 배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익혀서 내 몸 안에 저장하는 것이 학습이다. 글쓰기도 처음에 기본적으로 학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공부와는 달리 바로 지식이나 정보를 배우는 학보다 몸으로 익히는 ‘습’이 중요하다.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메모나 기록을 잘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첫걸음도 기억이나 인상, 생각의 메모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자.

<메모 또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 예시 1>

이제는 디자인이 멋진 신발보다 발이 편한 신발이 좋고, 입어서 옷태가 나는 바지보다 움직이기에 편안한 바지가 좋다.

사람도 그렇겠지?

나는 편안한 사람인가, 아닌가?

생각이 잠시 꼬리를 물며 지나간다.

<메모 또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 예시 2>

면도를 하며

6월이다. 한낮의 태양이 뜨거움을 너머 따갑기까지 하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틀어진 사무실이 그리워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나선 것이 꽤 오래전이다. 다행히 남들이 잘 모르고, 안다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쉬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야의 원고를 써오면서 먹고사는 일은 그럭저럭 유지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일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덧 내 젊음도 시나브로 지나갔다.

이즈음 박범신의 소설 ‘은교’중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는 말이 자주 떠오르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생이라는 게 손에 쥔 모래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면도를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선 순간, 삶에 적당히 찌들은 중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 패기에 넘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씽긋 웃어주던 젊은 남자의 모습은 거울에서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이제는 그를 대신해 얼굴 군데군데 하얀 수염이 자라고, 인생이라는 산길을 걸어가며 얼굴 곳곳에 잔주름만 새겨진 중년 남자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 모래알 같아.... 마치 백사장에서 모래를 한 움큼 손에 쥐었다 펼쳤을 때의 허무함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껏 써보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는 기분이야. ”

거울 속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려본다. 그러다 문득 면도를 위해 쉐이빙 폼을 얼굴에 바른 남자는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코밑과 턱에 돋아난 수염을 따라 움직이는 면도기처럼, 언젠가는 깎이고 깎여서 더 이상 깎을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수염처럼 그 남자의 시간도 그렇게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 2009년 6월 지호원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