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위해 하나된 종교 화합의 장을 돌아보다
상태바
‘독립’ 위해 하나된 종교 화합의 장을 돌아보다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4.05.24 0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원이 된 학교와 신문사 자리엔 표석만 남아
(협)마을대학종로는 「2024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에 선정된 ‘종로, 역사의 라이벌’ 프로그램을 5월부터 10월까지 4차례에 걸쳐 운영한다. 그 첫 순서로 지난 5월 18일(토) 수송동, 견지동, 인사동, 경운동 등을 탐방하며 천도교를 중심으로 선조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이날 탐방은 증조할아버지(김승학)와 아버지(김계업)에 이어 3대째 독립운동사의 가학을 잇고 있는 김병기 선생이 해설을 맡아주었다. <편집자 주>

 

①수송공원(壽松公園)
명종의 며느리이자 순회세자의 세자빈인 공회빈 윤씨가 머물던 종로구 수송동 옛 용동궁 자리에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표석이 있다. 1919년 2월27일 밤, 보성사에서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중 종로경찰서 소속의 조선인 형사 신승희(일명 신철)가 들이닥쳤다. 이종일 사장으로부터 상황의 심각함을 전해들은 손병희 교조가 급히 거금 5천원을 준비했고, 이를 건네받은 신철은 만주로 떠났다. 이렇게 하여 독립선언서 3만5천부 인쇄가 무사히 완료됐다.

1914년 4월1일, 일제는 중부 수진방(壽進坊)의 수동(壽洞)과 송현(松峴·솔고개) 등을 병합해 새로이 수송동 이름을 작명했다. 1980년대 초 숙명여고(1981)와 중동고(1984)가 강남으로 이전한 공간에 빌딩들이 들어서고 자투리에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했다.
보성사 표석은 현재 수송공원 안에 있지만, 보성사는 원래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앞 회화나무 언저리에 보성전문학교와 함께 있었다. 공원 내에는 보성사 터 표석과 기념탑, 옥파 이종일 동상, 중동학교 옛터, 숙명여학교 옛터, 신흥대학 터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 화가 심전 안중식과 고희동 등의 활동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좁은 공간에 산재해 있다. 시간적 배경을 달리해 여러 학교와 인쇄시설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종합 안내판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월18일(토) 오전, 종로구 수송공원 내 이종일 동상 앞에서 ‘종로, 역사의 라이벌’ 참여자들이 기촬영 하고 있다.
5월18일(토) 오전, 종로구 수송공원 내 이종일 동상 앞에서 ‘종로, 역사의 라이벌’ 참여자들이 기념촬영 하고 있다.

 

②우정총국(郵政總局)
금석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고 고종에게 근대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고종은 건의를 받아들여 1884년 3월27일,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홍영식을 초대 우정총판으로 임명했다. 1884년 12월4일 밤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키고 왕과 왕후의 신변을 확보해 경우궁으로 모셨다. 그러나 12월5일, 고종 내외가 창덕궁으로 환궁하면서 수구파의 반격이 본격화됐다. 12월6일,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군이 창덕궁으로 들어가면서 개화파를 지원하던 일본군이 철수했고, 개화당의 갑신년(1884) 정변은 3일 만에 종말을 고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 망명길에 오르고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북묘(北廟)까지 갔다가 청군에 살해되었다.

본채를 제외한 건물이 소실된 우정총국은 개국 20일만에 폐쇄되고 1893년에야 전우총국(電郵總局)이란 이름으로 우편업무를 재개했다. 1905년 이후에는 한어학교, 중동야학교, 경성 중앙우체국장 관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엔 개인주택이었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매입해 1972년부터 ‘우정총국체신기념관’으로 사용했다. ‘14개조 개혁정강’에서 보듯이 갑신정변은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③태화관(泰和館)
우정국로 건너편 인사동5길로 나아간다. 헌종 임금이 총애한 후궁 경빈김씨가 거처하던 순화궁(順和宮)은 1907년 8월, 경빈 사후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차지하였다. 나중엔 이복동생 이완용이 별장으로 쓰다가 1915년 1월, 대규모 호텔 ‘태화관’이 들어섰다. 이후 1918년 대한제국 전선사(궁중음식 담당부서) 장선 출신의 안순환이 인수해 명월관 분점을 개점했다.
이곳 조선요리옥 자리에선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 강제퇴위 음모, 1910년 병탄조약 논의가 진행됐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이러한 모의가 벌어진 장소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모든 매국적인 조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화관은 1921년 미국 남감리교 여자선교부가 매입해 국내최초 사회복지기관인 ‘태화여자관’을 설치하고 태화여학교를 운영했다. 1936년 화가 이숙종이 태화여학교를 인수해 성신여대로 발전했다. 지금 태화관 자리엔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의 태화빌딩이 들어서 ‘크게 화합함’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에는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에는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했다.

 

④승동교회(勝洞敎會)
인사동 실내포장마차 거리를 따라 인사동3길을 지난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새뮤얼 무어(한국명 모삼열)가 1893년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옛 곤당골에 세운 작은 한옥에서 승동교회가 출발했다. 동네에 고운 담(곤담)이 둘러쳐져 있어 고운담길·곤당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교회 이름(곤당골교회)이 됐다. 무어 선교사가 양인(良人) 교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인근의 백정(白丁)들을 받아들여 ‘백정교회’로도 알려졌다. 2대 당회장인 이눌서(W.D. Reynolds) 목사 때인 1904년 10월, 인사동에 한옥을 사들여 이사하고 1912년 지금의 본당 골격을 갖췄다. 박공 지붕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붉은 벽돌건물은 1959년 증축공사로 초기의 모습을 잃었다.

인근 인사동·종로2가 일대를 가리키던 승동(承洞)이 1907년 연합부흥회(길선주 목사) 때 “인근 절골(寺洞)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교회가 되자”는 의미의 승동(勝洞)으로 교회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3·1운동 학생단 대표인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등이 다니면서 승동교회는 하층 기도실에 모여 학생들이 비밀회합을 갖고 학생동원을 점검하는 등 독립선언서 배포에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⑤탑골공원
세조가 고려의 흥복사 절터에 건립한 원각사 자리에 1897년(광무1) 대한제국 최초의 도시공원인 파고다(pagoda·塔婆)공원이 조성되었다. 광장이 없던 황도에 근대 공(public·公)적 공간이 들어선 것이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학생들은 “집결할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식을 가질 경우, 자칫 폭동으로 비화할 수 있다”면서 타이르는 태화관의 민족대표들과 행동을 달리하기로 결정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라며 경신학당 출신의 해주 사람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해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한 인물이 경성의학전문학교 모 학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원에 모인 5천여 명이 일시에 내지르는 “대한독립만세” 외침에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면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요사이엔 3·1운동 성지인 탑골공원(사적 제354호)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도록 이름을 바꾸고 담장을 없애 보다 개방적인 구조로 재구조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⑥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중앙대교당이 자리한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입구 우편에 ‘독립선언문 배부터’라는 표석이 있다. 보성사 이종일 사장의 집이 있던 곳이다. 좌편의 ‘개벽사(開闢社) 터’ 표석과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석엔 소춘 김기전과 소파 방정환의 흔적이 담겨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교세가 확장하면서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이전하고 300만 교도의 성금을 모아 1921년 준공했다. 건평 212평의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단층건물로 식민지 시기에는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기둥을 두지 않은 내부는 아치형 천장을 철근 앵글로 엮은 뒤 바로크풍 지붕을 덮었다.
대교당 우편에 자리한 15층의 수운회관은 1971년 건축됐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협력한 최덕신이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오르고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은 이후의 일이다.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종교행사는 물론 지금도 노동자, 여성, 참사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국강연회, 음악회,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종교행사는 물론 지금도 노동자, 여성, 참사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국강연회, 음악회,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105년 전 3·1만세운동은 우리나라 천도교, 개신교, 불교 세 종단이 주도하여 ‘독립’이라는 단일한 대의를 위해 하나로 뭉쳤던 민족의 소중한 경험이다.
해설자 김병기 선생이 용인땅 우봉이씨 선산 자락에서 기어코 두계 이병도의 무덤을 찾은 사연, 무장투쟁을 주장한 묵암 이종일과 비폭력주의자 의암 손병희의 논쟁, 변절자 여암 최린의 회한 이야기는 참가자들에게 약이 되고 밥이 되는 훌륭한 약밥이었다.
이날 탐방이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바른 역사를 왜곡하는 부류가 우리 사회의 주류인양 힘을 과시하는 이 시점에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역사인식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