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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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3.06.0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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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말을 인용해 이 책을 표현하자면 ‘작은 것이 강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30여 쪽의 포켓사이즈 책이지만 내용이 강하다. 재독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흔들리고 고통 받는 원인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작은 책속에 학자다운 분석력이 날카롭다.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세상은 병영, 공장과 같은 규율사회에서 21세기 들어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시민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되었다. ‘하면 된다’ 는 성과주의가 가져온 오늘날의 폐해는 바로 우울증과 피로사회를 가져왔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자기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서 타자착취보다 훨씬 효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인의 심심함에 대해서 말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인간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사유는 삶의 활동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활동적 삶>에서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고 말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 간다.”

 

분노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내가 귀촌할 때 주변으로부터 제일 많이 듣던 소리가 “심심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말이다. 도시의 문명 속에 살다가 한적한 시골에서 그야말로 심심해서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는 걱정은 사실 귀촌하는 나에게도 고민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만큼 심심함에 대해서 백안시하고 두려워한다. 심심하다는 것은 곧 할 일이 없다는 것이고 백수건달들이나 하는 짓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바빠야 한다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내 머릿속에 오래 자리하고 왔음도 물론이다. 귀촌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심심함에 대한 그런 걱정은 정말로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시골은 심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심심함이라는 상태는 정말 인생에서 자주 가져야 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철학적‘ 각성 때문이기도 하다.

성과사회는 자기착취의 사회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 간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한다. 저자는 현재의 사회시스템이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서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결국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이 책은 사회학적 철학서이며 철학적 사회학서이다. 현대사회를 떠받드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허구는 결국 인간의 욕망에 기초하고 있기에 개개인의 각성과 성찰만이 이 고통 속을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피로사회/한병철/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