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이 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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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이 준 것은?
  • 박인철 기자
  • 승인 2023.04.03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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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다

 

 

영화의 문제

영화 <집으로>에는 어린 유승호가 귀가 어두운 외할머니에게 "(물에 빠진 백숙 말고) 치킨"을 외치며 짜증내고  떼쓰는  장면이 있다. (전화와 편지를  대신할 그림을 아이가 밤새 그리는 뭉클한 마지막 씬과 달리) 나에겐 여기에 웃픈 사연이 딸려있다. 함께 그 순간을 보던 아들(당시 8살)이 우는 바람에 상영장 밖으로 나와야했다. 할머니께 못되게 구는 유승호가 아들을 심히 괴롭혔던 것이다. 펄쩍펄쩍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린 심정에 엄청나게 답답했나보다. 

 영화속 할머니만큼 꼬부라진 나의 어머니는 아직도 잔인한 영화는 못 보신다. 이젠 다 자란 그 아들은 일 년여  노량진 자취생활을 겪더니 반찬투정을 시작했다. 그가 함께 보자고 추천한 영화가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이 감독의 전작들부터 열렬했단다. 유치할 적 아들은 밤마다 집안 문단속과 소등에 철저했다. 작은 불편함도 못 견디던 아이가 끔찍하고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 앞으로 부모까지 끌어당길 정도로 변한 계기는 무엇일까, 단지 시간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 연습- 재난은 사랑의 기회

 악몽에 헤매이는 열일곱 스즈메. 눈 뜨자 악몽이 재현될 현실을 맞닥뜨린다. 그런데 재난의 원인이 스즈메 자신이다. 폐허 속 수상한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기에 봉인된 재난의 기운(미미즈)이 빠져나온 때문이다. 호기심에 열어젖힌 문 안쪽은 꿈 속 분위기와 같았으나 도달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한 편의 꿈이다. 엄마를 잃은 어린 스즈메가 1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밤마다 울먹이는 꿈. 그렇다면 상처는 어떻게 해야 치유되고 악몽은 어찌해야 사라질까? 설마 그 흔한 사랑타령, 맞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반하고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랑. 그게 어때서? 선남선녀는 단지 외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맑고 순수함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다. 착한 이들이 절절하게 사랑하는 이야기라는데 목숨쯤이야 몇 번이라도 걸 것이다. 문제는 절박함과 개연성이다. 그게 아니면 악마적 괴물이 필요하다. 

 

  여행 - 발견을 위하여

 앗, 예상이 빗나가면서 영화는 로드무비로 바뀌었다. 이것은 사라진 <두꺼비 신랑>이나 <구렁덩덩 신선비>를 찾는 새색시의 모험담이다. 흰빨래는 검게 빨고 검은 빨래 희게 빨아 주어야 갈 길 알게 되는, 우리 전래동화의 스토리와 같다. 과제를 해결해 가면서 모험은 계속된다. 난관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몇 년전 유행한 포켓몬 대신, 고양이와 폐허의 문을 찾는, 게임과도 같은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큐슈에서 시코쿠, 고베를 소개하는 여행영화가 됐다. 새로 사귄 사연 속에 맛난 음식까지 끼어있으니 틀리지 않다. 미미즈의 문으로 이용되는 폐허는 (재난으로)파괴되고  (외면으로)잊혀졌기에 비로소 폐허가 된다. 온천 리조트와 놀이공원, 학교 등 한때 즐거운 대화와 웃음 소리가 가득했을 장소는 과거도, 미래도 기억되지 않음*으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완전한 흉물이 되는 것이다. 스즈메가 탄 관람차에 불이 들어오고 작동되자 사람들의 눈에도 뭔가 반짝인다. 한 사람의 시선이 닿으면 사람이건 사물이건 장소건 새롭게 인식된다. 그러니까 망가지고 부서진 게 원인이 아니라 회피와 은폐가 진정 버려지는 까닭이므로 돌아보라고, 다시 보라는 듯하다.  그 곳을 다시 찾고프게 손짓하는 것은 그 곳 사람과의 인연이다. 이모와 함께 그 여정 중의 인연을 다시 만나는 영화의 여운이 길다.

 

 

  역할 연습 - 온몸 던져보기

  로맨스는? 영화의 절정 즈음, 사랑도 고비를 맞는다. 소타는 나무의자로 변한 채 절뚝거리며 돈벌이도 안되는 토지시 임무에만 충실하다. 그의 늦잠을 깨우려면 키스를 해야한대서 잠시 설레는 게 스즈메의 (짝)사랑의 진도다.  괴물은 있으나 악마는 아니고 절박하나 시간에 조이지는 않으며 오로지 트라우마에 의지한 불안의 개연성만이 긴장을 조성한다. 재난의 기미를 아는 자와  보는 자, 이 둘만이 초조하고 스스로의 사명감에 충실하여 "아름다운" 청년 소타를 희생한다. 그녀는 그제야 솔직해진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하고 남들을 이끈다. 사랑을 선택하고 회복할 방법까지 스스로 정한다. 스즈메는 다시 교복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으며 소타의 워커를 빌려 신고 끈을 조임으로써 그의 (문단속꾼=토지시)역할과 (봉인지킴이=카나메이시)운명까지도 대신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구하고 악몽의 원인과 마주한다. 스즈메의 미래는 밝다. 도움이 있었으나 해결은 자주적이었으므로. 아직 어린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다. 그래서 기특하고 멋져 보인다. 어른에게 의존하지 않고 맨몸으로 맞선 것이다.

 

  미래의 문제- 과거에서 답을 찾는다

 세상과 소타를 구할 일이 온전히 스즈메에게만 맡겨진 듯하지만 동행자는 더 많아진다. 소타의 친구인 세리자와와 이모 타마키가 그들이다. 거기에 고양이 두 마리(뒷문 지킴이 다이신과 사다이신)도 추가할 수 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우연한 운전자와 억지 동행자 같지만 걱정과 불만을 토해내고 싸우거나, "다투지 마세요"등의 응원가를 불러주고 "해결해 주세요" 라고 명령하는 여행길의 동반자다.  결과적으로 스즈메가 악몽과 마주하는 성장의 길을 반반씩 데려다 주었다. 그 길의 끝에는 처음부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잘 생기신 분' 소타가 있고 그 역시 엄마없는 시절을 살았던 동병상련의 청년으로서 스즈메의 모범적 안내자다. 

 

  비유 문제- 영화적 재난은 개인적 사건이다

 국가적, 지역적 재난에는 희생자와 피해자 그리고 생존자가 생긴다. 자연재해는 속수무책이고 그 후의 삶도 어찌할 바가 그리 많아보이질 않는다. 우연히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처지에 안도하고 그렇기에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문득문득 하며 우리는 산다. 그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고 달라지겠냐는 자괴감도 들지만 그거라도 해야 덜 미안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리라는 불안 탓이기도 하다. 2022년의 수해와 10.29 참사는 우리의 방심과 오만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적 성장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사회적 재난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성인이 된 후 되돌아보았을 때, 그가 발견할 사랑이 많았으면 좋겠다. 외롭도록 방치되었다고 깨닫는다면 그 분노는 사회적 재난의 원인이 되겠다. 각종 폭력등 사회적 범죄는 그렇게 방치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것 아닐까? 내가 미처 돌보지못한 아들의 시간여행을 함께 살아 준 이웃과 그들이 보여주었을 다양한 호의- 농담과 장난, 눈빛와 웃음, 사소한 칭찬과 음식들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