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해방일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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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해방일지를 쓰다
  • 박인철 기자
  • 승인 2023.03.20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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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썬" 오브 모닝

 

 그해 여름은

 엄마와 아빠의 통화를  소피가 엿듣습니다. 아빠는 이혼한 엄마에게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화장실에서 언니들을 엿보고 그들의 '과감한' 연애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아빠는 당구를 가르치기도 하고 손목잡이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여러 번 연습시킵니다. 스킨스쿠버를 경험하고 머드팩도 발라 봅니다. 이십 년 전 튀르키예 휴양지에서 보낸 아빠와의 여름방학이 소피의 방안에서 재생되는 영화입니다. 그저 아침 햇빛처럼 반짝이던 자상한 아빠, 순수한 딸의 리츄얼일까요? 소피의 곁에서 갓난 아기 울음 소리가 나즈막히 들리면 그 아름다움은 의심스럽게 흔들립니다.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영상을 보는 소피에게는 그 때의 기억이, 관객에게는 영상에 담기지 않은 아빠의 모습까지도 펼쳐집니다. 춤추는 아빠의 모습이 왠지 불안해 보입니다. 함께 있을 땐 밝은 아빠가 혼자선 자책하듯 소리내어 울기도 하고 밤바닷가를 헤매기도 합니다. 소피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 아이도 사귀어 보고 청춘들의 사랑도 가까이서 목격합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한 휴가는 아닙니다. 그래서 아빠를 위해 축가를 불러주고 응원가도 부른 듯합니다. 더 오래 있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같은 하늘아래 있으면 같이 있는 것"이라고 어른스레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와 소피 중 누구를 위한 영화일지 아리송합니다.

 

  그땐 아빠가, 지금은 내가 

 흐뭇한 기억은 언제든 소환할 적마다 그때의 오감을 동반하며 되살아납니다. 거기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의미로 바래지 않고 재생되는 기억과  새로이 의미를 발견하는 기억. 그러나 이 둘은 다른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으로 변모할 때  기억의 당사자는 그와 함께 어떤 성장 또는 변화를 겪는 사건이지 않을까요? 무한 반복되던 기억에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는 거죠. 어떤 충격이 있거나 경험이 쌓여서 이해불가였던 것이 이해된다면. 혹은 기억 속 어른의 나이에 같은 처지가 되면. 영화는 몰랐던 그 때 아빠의 모습을 퍼즐조각 뒤집듯 드러내어 맞춰 줌으로써 새로운 과거를 만듭니다. 그것은 현재의 소피가 추정하는 당시의 아빠입니다. 현재의 소피는 영상 속 아빠의 나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영상 속에서 춤추던 아빠의 얼굴과 반복교체되는 것은  현재 소피의 얼굴입니다. 

 

  누구랑 어떠하든

 그러므로 영화는 소피를 위한 것입니다. "마약이든 사랑이든 나는 다 해 봤으니 혹시 너도 경험하거든 아빠에게 다 말해 달라."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려는 것 같습니다. 감당하리라 자신했던 일에서 흔들릴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거나 그만큼 나약해져서 울고 싶을 때가 지금일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아빠도 혹시 지금의 소피와 같은 처지였던 것은 아닐까, 연민하고 지금이나마 연대의 인사를 보내면서.

 침대에서 깨어나 근심스런 아침 인사를 보내는 애인에게 소피가 미소짓습니다. 어찌 이런 앞날(은 사실 영화가 제대로 보여 주지 않기에 이 장면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습니다)을 알았을까, 혹시라도 하는 걱정으로 미리 충전해 준 젊은 아빠. 덕분에 소피는 뭉클하고 영화는 애틋해 집니다. 함께 한 여름동안 그녀는 온갖 사랑을 다 경험(?)했고 그 시간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기억됐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오늘을 비추는 것은 이제 막 창 밖에 떠오르는 아침빛입니다. 소피 역시 자신의 아이를 듬뿍 지지하리라 관객은 믿게 됩니다. 그녀가 아마도 아빠를 위해 불렀던 응원가(R.E.M.의 <Losing my religion>)를 때마다 흥얼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