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과 "밀양"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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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과 "밀양"에 대한 단상
  • 박인철 기자
  • 승인 2023.02.2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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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과 이창동과 하루키가 공동 제기한 문제

 

 헛것의 질문

 하필 하루키의 원작은 <納屋を焼く>이고 이의 번역은 <헛간을 태우다>입니다. 이창동의 영화 속에서 벤은 "낡은 비닐하우스"를 <버닝>합니다. "納屋"과 "헛간"과 "낡은 비닐하우스" 셋은 똑같나요? 거의 그렇죠. 한자로만 보면 "납옥"은 "거두어들이는 집" 이란 뜻으로 "곳간"이나 "저장고"가 어울립니다. 그런데 헛간으로 번역한 사람은 뭔가 다른 기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기미에 저는 환호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말 "헛간"(= 虛間)이 주는 "빈 건물" 또는 "잡동사니 창고"란 느낌이 영화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헛걸음, 헛고생, 헛살다, 헛디디다"에 쓰인 접두사 "헛"의 어원 정보가 "【←허(虛)+-ㅅ】"와 같이 제시돼 있습니다.


  무엇이나 어쨌거나 별 가치없는,  '헛것'이므로, 가득하거나 텅 비어 있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밀양>(혹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을 보면서 들었던 (어떤 반성적인 태도로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또는 내 안의 무엇을 죽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람은 헛것으로 산다', '헛간 같은 삶을 죽여야 한다', '헛간 같은 생각을 태워야 산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무엇이 '헛것'이고 '헛간 같은 삶과 생각'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다다릅니다. 


  신애의 헛것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전도연)가 부여잡는 삶의 기둥들을 살피면 그 답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원작 소설보다 더)영화 속 신애의 상황은 비극적입니다. 피아니스트의 꿈은 좌절됐고 도피처로 삼았던 남편(과의 결혼)은 외도와 이별(죽음)을 남겨줬기에 그녀에겐 아들 준과 (그녀의 아픈 유산을 몰라주는)이웃이 필요했습니다. 허나, 아들마저 잃은 뒤에는 이웃이 조건적으로 제시하는 신앙을 움켜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덕으로 빈 곳을 채우고자 신애는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아들의 살인자가 신으로부터 직접 용서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그 기회조차 허망하게 빼앗기므로 더 이상 멀쩡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잃습니다. 그제야 그녀가 매달리고 부여 잡았던 모든 것- 꿈이며 결혼, 자식이며 신앙 등 -이 거짓이고 헛된 것임에 분노합니다.  "사랑도 거짓말 , 미움도 거짓말"이죠.  그녀는 죽지도 못하고 병원과 약물에 의존합니다. 모든 관념들의 허망한 정체가 탄로납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가치롭게 살 수 없으므로, 결국 "벌레"와 같은 목숨이기에 이청준의 원작은 <벌레 이야기>입니다.

 

 관객의 헛것


 다시 <버닝>으로 돌아가서 태워버려야 할 '헛것'들은 무엇인지 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 전에 몇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독자-관객으로서 우리는 혹시 주인공 종수(유아인)에게 감정이입하거나 동일시하진 않았나요? 가난한 문학 청년의 순수한 사랑을 앗아간 벤을 (어느새 미워하고 게다가 증거도 없이, 있다고 해봤자 그의 서랍 속에 있는 해미의 것과 같은 분홍시계를 근거로) 해미의 실종과 살해의 범인으로 속단하고 처단해도 될 정도로 공감하고 있진 않았나요? 그가 뚜렷한 직업도 없으면서 비싼 차를 몰고 강남에 살며 한량짓을 한다고. 또는 대마초를 피우고 매사에 냉소적인데다 어린 여자와의 관계를 쉽게 교체하는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당연스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에 더해 종수에게는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선과 판단이 질투와 오해로 일그러지고 분노에 휩싸이고 있음을 굳이 보지 않게 됩니다. 

 

   익숙한 헛것

 (객관적으로나 냉정하게, 탕웨이처럼 묻습니다.) 벤이 그렇게 나쁩니까? 종수의 계급은 그렇게 당당한 겁니까? 하층민의 계급적 감정과 판단은 늘 떳떳한가요? 빈부가 도덕적 판단의 준거입니까? 유전무죄의 현실이 억울하다고 하여 무전무죄라고 동정하는 맘이야 이해하지만, 이렇게 익숙한 영화감상의 관습대로 선악을 구분하고 그와같은 사회계급적 기준으로 상벌을 가르면 은유적 메시지는 묻혀지고 맙니다. 다른 영화에 비해 새로울 게 없어집니다. 임우기가 우려하고 새로운 비평방식으로서의 '유역문화론'을 펼치는 근본 동기 중 하나입니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지만 또렷하게 언급된 장면들 모두를 놓치지 않고 건져 올릴 수 있는 그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목매고 있으나 쓸모없는, <버닝>해야 할 '헛것'잡이가 될 것입니다. 

 

  또, 신애의 헛것


 영화 <밀양>의 신애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추구하던 이상이 모두 깨졌기 때문입니다. 꿈도, 배우자도, 도피도 깨지고 소박한 삶도 깨졌습니다. 그토록 그녀를 무너뜨린 것이 (부자인 척 땅을 보러 다녔던) 그녀 자신의 허위 탓이었기에 신애는 더욱 비참할 겁니다. 귀중했기에 소중히 여겼고, 늘 깨질까봐 불안했지만 막상 그토록 쉽게 깨져 버림에 황망했습니다. 도저히 되돌리지 못할 것이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기도와 천국의 약속도, 사랑과 용서로도 대신할 수 없는 죄책감과 억울함이 쥐여집니다. 그 거짓에 대한 분노가 차라리 살게 합니다,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신에게 복수하고 신자들을 조롱하며 살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헛것의 실체를 깨닫고 그에 분노하는 자의 운명입니다. 

 

 종수의 헛것

 <버닝>의 종수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비가 그랬듯이 (벤이라는 21세기 한국에 존재하는 '막대한  개츠비'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했고 그로 인해 남은 생을 원망과 후회로 살 것입니다. 해미를 빼앗길 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벤이 가진 세련됨과 여유를 질투한 것이 틀림없음에도 그런 자기 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사랑'과 '정의'로 둔갑시켜 '자율'적으로 처단했으니까요. 보편적이고 최고 지선으로 여겨지는 사랑과 정의가 가장 무서운 무기로 변했습니다. 예수의 이웃사랑도 십자군의 손에선 이교도를 때려잡는 모순(矛盾)이 된 역사처럼요. 전두환 일당의 정의는 학살과 독재의 가면 노릇을 했잖습니까.  물론 종수는 기만적 학살정권의 전략보다는 광신적 편견에 사로잡힌 십자군에 가깝긴 합니다. 그런데, 만약 영화의 후반부가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쓴 '소설'이라면 인물들의 헛것과 그에 대한 태도는 달라집니다. 소설가로서의 종수는 헛것에 얽매인 사람들의 허망함을  묘사하면서 헛것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냉정할 테니까요.

 

  일반적 헛것

 종수의 어미는 실없는 웃음과 농담으로 사는 듯합니다. 오랫만에 만난 아들에게 반가움이나 미안함도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 봅니다. 빚을 갚아주겠다는 아들의 약속도 가볍게 넘깁니다. 종수는 다만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의 여부에 집착하지요. 딸의 안부에 관심도 없는 그녀의 가족을 종수가 원망스럽게 바라봅니다. 해미네 가족은 빚을 갚기 위해 사는 삶인데  빚을 다 갚으면 후련할까, 허전할까 문득 나는 궁금해집니다.  

 법 집행자들은 사회적 책무로 살고, 권력자는 힘으로 살며, 가진 자는 사치로 삽니다. 피억압자는 투쟁으로 살고 소수자는 항거로 삽니다. 그 싸움의 끝에는 희망을 달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리라는 희망. 역사는 그렇게 진보해 왔다는 주장에 기댑니다. 현재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휴머니즘의 발로입니다.  여전한 착취와 억압의 시스템, 그로 인한 인권 말살과 생명을 경시하는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므로 민주시민이라면 사회개혁 요구는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해미는 계속 찾아 헤매일 겁니다. 그녀가 찾는 것은 리틀 헝거가 아닌 그레이트 헝거로서 찾는,  삶의 의미니까요. 일종의 구도적 삶이죠. 그렇지만 그때 깨달은 도는 도라고 말하는 순간 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듣는 것은 말인데 그 말은 항상 비유일 뿐입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仁義禮知信은 그저 길(방법)일 뿐, 道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 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헛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