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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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고백
  • 박인철 기자
  • 승인 2023.02.0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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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자국들

 

나의 드라이브 마이 카


 아들의 실밥 뽑는 날, 운전이 부드럽지 않냐고 자랑스레 물어본다. 속도는 느리게 유지하면서 가속과 브레이킹을 최소화한데다 다행히 도로는 한가한 편이었기에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영화 속 미사키가 운전을 배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돌아오는 길은 새로 알게 된 빵집을 경유한 다음, 크게 P턴을 할 거다. 아파트가 들어선 옆으로 옛 골목을 가보고 싶었다. 내게 자전거를 처음 타게 해 준 친구네 비탈길, 그 길을 뒤쫓아오신 엄니의 숨소리가 내민 젓가락, 착한 미소를 가진 승완이 아저씨 아줌마네 보일러 가게. 추억은 발설되지 못하고 꿀꺽 삼켜졌다. 기억보다 반으로 좁혀진 길은 여기저기가 패이고 턱이 많아 넘을 적마다 아들의 비명과 짜증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나의 낭만적 흔적이 아들에겐 상처 흔들기였다.

 

 흔적들


 흔적 1. 아내 오토는 최고조의 교성 대신 떠오른 소설의 장면을 발설한다. 아침 출근길에 남편 가호쿠는 아내에게 그 장면을 도로 돌려준다. 어릴 적에 폐렴으로 잃은 아이의 흔적이다.
 흔적 2.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남편은 교차로에서 다른 차와 충돌한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아내의 비밀을 모른 체하기 위한 스트레스로 보인다.
 흔적 3.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만 알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고 징표를 가져온다. 
 흔적 4. 캐스팅한 주연 배우는 자기가 오토(아내)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며 소설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흔적 5. 가호쿠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바냐’ 역할을 거부하고, 의사 역을 지망했던 다카츠키에게 넘긴다. 오디션 연기에서 보았던 그의 과감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흔적 6. ‘소냐’역의 배우(유나)는 수화로 연기한다. 침묵의 무대 위에는 손짓이 남는다.
 흔적 7. 운전수 미사키가 안내한 곳은 원폭기념비와 히로시마 바다가 직선으로 이어지도록 건축된 쓰레기 처리장. 거기엔 날마다 쓰레기가 “눈처럼" 낙진처럼 뿌려진다. 
 흔적 8. 부산 마트 앞, 미사키가 장을 보고 유나네 개와 함께 '마이카'를 몬다. 가호쿠와 그녀의 고향인 홋카이도에 다녀온 흔적이다.

 

 지울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


 추억이 아닌 흔적은, 아픔의 징표이고 (흔적 1), 사건의 증거이며(흔적 2, 7), 이어지는 분노와 폭력의 원인이 된다(흔적 4, 5). 따라서 들춰지기보다는 감추고 싶고, 남들은 모른 척해 주거나 잊어주기를 바란다(흔적 5).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한 죄책감과 내가 대신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시달린다(흔적 3). 소홀하거나 화를 냈던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난 이가 있다면 더욱 원망스럽다. 맛난 것을 나눠 먹고 놀이와 장난하며 보냈던 순간을 다신 할 수 없음과 사랑한다고 말 못 했음을 후회하고 괴로워한다. 자칫 절망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감춰둘 수만은 없다.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기에 길고도 차분하며 알맞은 애도가 필요하다(흔적 7). “어쩔 수 없었다”라는 공감과 “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가 절실하다. 그래서 소냐는 바냐를 안고 천천히 쓰다듬는다(흔적 6). 평생에 걸친 사과와 자기 처벌이 조금 작아질 수는 있다. 흔적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마크(마이카)로 번져갈 것이다(흔적 8). 

 

   '소냐'의 위로 혹은 체홉의 조언


 어떻게 하겠어요. 또 살아가야지요! 바냐 삼촌, 살아나가요. 길고 긴 낮과 밤의 연속에서 끊임 없이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갖다 주는 시련을 우리 참고 견디어 가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나이 든 후에도 계속 쉬지 않고 남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들의 때가 오면, 그땐 우리는 편하게 죽어서 무덤 저쪽에 가서 우리들이 괴로웠던 것과, 우리들이 울었던 것과, 우리들이 어려웠던 것들을 이야기 하도록 해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을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 때는 삼촌, 삼촌도 저도 밝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들은 기쁨에 넘쳐서 지금의 우리들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써 돌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편안히 쉬게 되겠지요, 삼촌, 저는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우리는 편히 쉬게 될 거예요!
         .                          ( 희곡 «바냐 아저씨» 중에서)

 

기미 없는 나라


 그렇다면 사회적 흔적은 어떨까? 국가적 흔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인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 하는 공감과 용기가 필요하지만. 
 «여자없는 남자들»(영화의 원작)을 고백한 하루키의 공감과 이 영화를 감독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용기를 
칭찬한다. 일본 시민과 정치권의 반응을 지켜볼 일이다. “Drive your car, All we watch your J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