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사의 설경(黔丹寺雪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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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사의 설경(黔丹寺雪景)
  • 曠坡 先生
  • 승인 2023.01.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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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단사의 설경(黔丹寺雪景)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깊은 산속 사람 없고 새도 날지 않는데

고촌암담랭운퇴(孤村暗淡冷雲堆)/쓸쓸한 산촌에 곧 눈이 쏟아질 것 같다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절의 스님 무너진 논둑 빙판길 걸어서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꽁꽁 언 강물 얼음장 깨고 물 길어오네

 

 

*한 폭의 겨울 풍경

조선 명종 때의 시인 정렴(鄭磏)의 시입니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이 시에서는 곧 눈이 내릴 듯한 암울한 풍경 속에서 스님 한 명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이 얼어 빙판이 된 논둑길을 아주 위태롭게 걸어가, 강물의 얼음을 깨고 물 길어오는 스님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1행에서 ‘사람도 없고 새도 날지 않는다’고 해놓고, 정작 3행에서는 스님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이치상 뭔가 맞지 않는 듯한데, 시는 그럴듯하게 어울립니다.

시인은 이때 스님을 하나의 인간이 아닌 정물로 보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정물이란 없지만, 물을 길어오는 스님의 행위조차도 시인은 정물로 인식한다. 그래서 이 시는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집니다. 스님의 행위가 있지만, 그 행위조차도 정물 같은 그림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시 속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님은 그림 속의 정물일 뿐입니다. 즉 스님은 세속을 떠나 있는 존재로서만 인식될 뿐, 시인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있음을 뜻합니다. 시인과 스님 사이에는 엄연하게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경계선이 놓여 있습니다. 그 거리감이 이 시를, 시가 아닌 한 폭의 풍경으로 인식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