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폭탄범 안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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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폭탄범 안경신
  • 신영란 작가
  • 승인 2019.12.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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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의 죄를 증명하라

 

폭탄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온 임신부.

여성으로선 최초로 일제가 사형을 선고한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이토록 뜨거운 이름으로 불린 여성은 없었다. 1921년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폭탄 거사의 유일한 여성 대원 안경신이 바로 그녀다. 장덕진과 문일민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으킨 거사는 한반도를 순방하는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무력 투쟁의 일환이었다.

안경신은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폭약을 허리춤에 숨기고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을 건넜으나 거사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공교롭게도 그녀와 장덕진이 평양경찰서를 습격한 날 밤에 폭우가 쏟아져 폭탄은 불발되고 말았다. 다른 대원들은 평남도청 일부를 파괴하고 현장에서 일경 두 명을 사살했다.

조선총독부는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경찰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관련자들을 잡아 들이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서너 달이 지나도록 이들의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해산이 임박한 안경신은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산으로 들로 홀로 숨어다녔다. 체포 당시 그녀는 갓 태어난 사내아이와 함께였는데 제대로 먹지도 눕지도 못해 몰골이 어찌나 처참했던지 일본 경찰이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품에 안고 포승에 묶여 경찰서로 끌려갔다. 재판정에도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방청객들은 기함했다. 그녀가 휴정을 요청하고 아이를 달래며 비통한 한숨을 내쉴 때면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찰에서 검찰에 이르기까지 지독한 악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건에 대해 일체 입을 다물었다. 일제는 일심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나 끝내 그녀를 형장에 세우진 못했다. 유일한 목격자였던 평양 숭실중학교 학생이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는 고당 조만식의 설득에 증언을 번복한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일본은 나의 죄를 입증하지 못하니 나는 무죄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방청석에선 소리 없는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때맞춰 먼저 상해로 탈출한 문일민은 백범 김구를 위시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연명으로 된 공문을 조선총독부와 재판부에 보냈다.

-도청에 폭탄 던진 사람이 여기 있으니 안경신은 방면하라.-

결사대는 3개 부대로 이루어졌고 안경신과 문일민은 다른 조에 속해 있었다. 문일민의 행적만을 상세히 밝힌 공문은 더더욱 재판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세간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장장 3년여에 걸친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수세에 몰린 일제가 적용한 범죄는 치안방해죄 및 공공기관 폭파 공모죄.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법정에서 그녀는 분연히 외쳤다.

“당신들이 무슨 판결을 내리든 나는 죄가 없다.”

투사로서 이처럼 강인한 면모를 지녔으나 인간으로서 안경신은 너무나 가혹한 삶을 살았다. 스물다섯 살 무렵 남편과 사별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녀는 재혼을 약속한 남자와 중국에 망명했으나 상대는 아편 중독자였다.

감방에서 걸음마를 배운 아들은 맹아가 되었다. 7년 후 가출소했을 때까지도 눈을 뜨지 못한 아들을 부여안고 그녀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영영 세상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정부는 1962년 그녀의 이름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평소 동지들에게‘침략자들을 섬나라로 쫓아낼 방법은 무력 응징뿐’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는 그녀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볼 수나 있었을까.

출처: 우정사업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