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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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느낌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2.10.2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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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이 책은 미국의 여성유전학자인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이다. 책의 저자인 이블린 폭스 켈러가 매클린톡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아가며 쓴 책이다. 책을 읽어보면 위대하고 신비한 자연의 세계에 경탄하게 된다. 옥수수 하나를 통해 마침내 생명의 섭리를 깨달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된다. 유전자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여서 순식간에 그 모양새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변화가 반복적으로 생기다가 결국 어떤 상태로 안정을 다시 찾게 되면 새로운 생물 종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결국, 생명은 DNA가 RNA를 만들고 RNA가 단백질을 만들고 단백질이 모여 몸을 만드는 것이다. 생명체와의 교감을 통한 생명의 느낌은 문자 그대로 매클린톡의 시각을 확장했다. 자연과학도 역시 감정적 몰입 없이는 훌륭한 결과를 산출할 수 없다. 자연을 둘러보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모든 현상이 거기에는 이미 다 존재하고 있다. 자연의 끝없는 창조력에 비해 우리의 과학지식은 너무나 볼품이 없다.

매클린톡은 말한다. "풀밭을 밟고 지나갈 때면 나는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해요. 사실은 내 발밑에서 풀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거든요."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똑같이 하고 있다. 매클린톡은 시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인의 눈으로 읽어낸 자연의 질서, 생명의 질서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고자 노력했다. "과학의 방식은 사물의 관계를 꼼꼼하게 따지는데 요긴합니다. 견고하고 믿을만한 방법이지요. 그러나 그게 곧 진리는 결코 아닙니다. 과학적 기술을 발전시켰으니 훌륭한 일을 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기술은 곧 해악이 되어서 돌아와요. 세상 만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그저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의 작동에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과학계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하고 무시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토머스 쿤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가 생각난다. 하나의 과학 학설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그 책은 보여주는데 당시 여성학자로서 매클린톡이 겪어야 했을 어려움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간다.

이 책의 역자인 김재희의 후기 글도 감동적이다. “자연을 약탈하고 겁탈한다는 소위 남성적 투지가 곧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의 미덕으로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사의 비극적인 흐름이었다. 자연의 비밀을 '캐내야만' 힘을 얻고 그렇게 큰 힘을 장악해야 자연을 더욱더 학대하며 더 큰 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서구열강중심의 논리가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총도 만들고 큰 배도 만들어 다른 대륙에 사는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곳에 식민지를 획득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참으로 남자다운 생각을 키웠다. 이런 흐름은 산업사회를 일으킨 원동력으로 자리 잡은 후 이른바 정보사회로 들어섰다는 오늘날까지 기승을 부리며 지구 곳곳의 다양한 전통과 생명의 터전을 말살하는 폭력적인 과학기술의 맥을 잇고 있다.”

“여자들이 자기 일을 가질 수 없었던 지난 시절에는 남편의 바람기를 짚어내는 데나 쓰이던 그 왜곡된 용도를 온전히 되돌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잘못된 현실을 교정하는 쪽으로 활용할 것을 이 책의 저자 이블린 폭스 켈러는 천명한다. 더욱이 이런 요청이 만약 비과학적인 진술처럼 들린다면 그건 그만큼 공격적이고 약탈적인 과학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 이 책의 저자인 켈러를 비롯하여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여성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을 통해 자신들을 억죄던 정서적인 단절감, 이질감 혹은 소외감의 정체가 바로 근대과학의 곳곳에 찍혀있는 가부장제의 인장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 생명현상에서 일어나는 절묘한 변화들을 자연의 거룩함으로 이해하는 것, 이는 오늘날 과학기술이 야기한 온갖 폐해를 극복하고 중병으로 몸져누우신 지구 어머니와 인류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생명의 실존과 통하는 그녀들의 '느낌', 생명의 거룩함을 몸과 마음으로 함께 느끼는 녹색의 감수성은 지구환경이 파국으로 치닫는 21세기, 인류문명을 구원할 소중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책 마지막에 매클린톡은 고백한다. 평생 옥수수 하나만을 들여다보며 미세하고 오묘한 유전자의 세계를 살펴본 과학자가 결국 깨달은 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 들판과 개울가에서 뛰어놀며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고 말한다. 생명의 세상을 들여다보다 마침내 경지의 세계에 도달한 과학자라면 누구나 비슷한 말들을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도 한 점 자연의 일부일 따름이다. 특별한 지식을 획득할 때의 느낌이나 상태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환희나 구도자들의 삼매경과 비슷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연법칙은 결코 머리로 알아내는 게 아니다. 그건 그냥 살면서 깨달은 진리와 함께 직감적으로 알아채곤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닐스 보어도 이렇게 말한다 "양자이론을 통해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생명과 우주의 실존적 드라마에서 배우와 관객의 입장을 온전히 설정하려면 우리는 결국 부처나 노자와 같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간파한 인식론적 '깨우침'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오묘하기 그지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사실을 이미 알게 모르게 깨닫고 사는지도 모른다. 심오한 과학자의 책을 읽은 소감은 과학자의 연구결과만큼이나 헛헛하고 아득하다.

 

생명의 느낌/ 이블린 폭스 켈러/김재희 번역/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