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놈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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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놈 길들이기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2.09.1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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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듯하게 하게 만드는 이야기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냥 '홍총각'이라고 불렀는데, 밥도 남보다 두 배 이상 먹었고 일도 서너 배는 잘하는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 일을 해주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부잣집에서 장리쌀이라도 구해다 연명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흉년이 든 어느 해의 일이었습니다. 보릿고개가 되었는데, 그 마을에는 장리쌀을 구할 만한 집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장마 때 산사태로 마을의 논밭이 쓸려나간 데다 새해 들어 가뭄이 심해 보리농사까지 망쳤던 것입니다.

그 마을에서 장리쌀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홍 총각은 고개 너머 마을로 장리쌀을 얻으러 갔습니다. 빚을 못 갚으면 머슴살이라고 하겠다는 조건으로 어렵게 보리 두 섬을 얻었습니다.

 

보리 두 섬을 지게에 지고 고개를 넘는데 산도적을 만났습니다.

"거기 짐을 내려놓고 가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산도적이 제법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홍 총각은 순순히 지게를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져갈 테면 가져가 보슈."

"잔말 말고 너는 어서 저쪽으로 꺼져라."

산도적이 소리쳤습니다.

"보리 두 섬인데 짐이 제법 무겁소. 그래서 그쪽이 지게를 지고 일어설 때 뒤에서 받쳐주려는 것이오,"

홍 총각의 말에 산도적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네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어서 지게를 놔두고 가던 길을 가거라."

"보아하니 나보다 힘도 없는 것 같은데 혼자서 어찌 보리 두 섬을 지고 일어서겠다는 것이오."

산도적이 홍 총각의 얼굴을 살펴보니 악의는 없는 듯하였습니다. 더구나 힘으로 하면 자신이 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상대가 고분고분한 것을 보니 적이 안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 좋다. 내가 너를 믿으마."

산도적은 홍 총각을 믿고 지게를 짊어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습니다. 막 지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지게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리 두 섬도 큰 무게였지만, 홍 총각이 뒤에서 받쳐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찍어 눌렀던 것입니다.

용을 쓰던 산도적은 곧 지게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를 기다려 홍 총각은 산도적을 끌어내 긴 머리채를 지게 뿔에 붙잡아 맸습니다.

"어디 혼쭐 좀 나봐라. 네놈도 힘깨나 쓰긴 하는 모양인데, 그걸 믿고 도적질을 하느냐? 그 힘으로 일을 하면 밥은 굶지 않을 것 아니냐?"

홍 총각은 보리 두 섬에 산도적까지 짊어지고 거뜬히 일어섰습니다.

"아이쿠, 내 머리야."

지게 뿔에 머리를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산도적은 반은 죽는시늉해댔습니다.

"이놈아, 그래도 정신 못 차리겠느냐?"

홍 총각은 일부러 더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걸었습니다. 지게가 흔들리자 산도적은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넘어가는데, 어느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게의 무게가 가벼워졌습니다. 홍 총각이 뒤를 돌아보니 산도적의 정수리 머리가 한 줌은 빠진 채로 지게에서 떨어져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도적놈아, 내가 더 혼내주려다 이쯤에서 보내주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마음 고쳐먹고 산을 내려가 양심대로 살아라."

홍 총각은 산비탈 저 아래서 나무 둥치를 겨우 붙잡고 몸을 가누며 일어서는 산도적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3년이 지난 어느 날, 홍 총각은 또 흉년이 들어 고개 너머 마을로 장리쌀을 얻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고개 너머 마을도 흉년이 극심하여 장리쌀을 빌려주는 부잣집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운 판인데 빌려줄 장리쌀이 어디 있소?"

이렇게 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던 차에 홍 총각은 어느 집 문 앞에 이르러 뜻하지 않은 주인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어이쿠, 장사님! 어서 오시오."

주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보니 정수리의 머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홍 총각의 손을 잡아끌며 방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곧 술과 안주까지 마련해 대접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영문을 모르는 홍 총각이 주인에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뉘신데 이렇게 환대를 해주십니까?"

"삼 년 전 고개 위에서 산도적을 만난 일 기억 안 나십니까? 그때 장사님 지게 뿔에 매달려 가다 정수리 머리채가 이렇게 뽑혀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숙여 정수리의 머리 빠진 곳을 보여주었습니다.

"아, 그때 그 산도적이 바로 당신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제가 그 도적놈이었습니다. 그때 장사님의 말씀을 듣고 개과천선하여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삼 년 동안 알뜰살뜰 모아 제법 재산도 마련하였습니다. 장사님께 진 마음의 빚 대신 보리 두 섬을 드릴 테니 가져가십시오."

술대접을 한 주인은 홍 총각을 곡간으로 안내하여 보리 두 섬을 내주었습니다.

홍 총각도 주인의 선심에 감동하였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어찌 이렇게 재산을 마련하여 안정을 찾았습니까?"

"그것도 모두 장사님 덕분입니다. 장사님 오시면 드리기 위해 먹는 것도 줄여가며 알뜰살뜰 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가 바뀔 때마다 곡간에 나락이 쌓이더군요."

주인의 말에 홍 총각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은 내가 한 수 배우고 갑니다."

홍 총각도 그 이후 먹는 것을 줄이고 알뜰살뜰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 감동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서로 양자가 주고받을 때 그 효과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감동이야말로 쌍방 교류의 큰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