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눈이 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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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눈이 먼 사람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2.08.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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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따듯해지는 가족이 함께 읽는 동화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백성들 중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양반이나 돈 많은 사람은 기름진 고기 안주에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고 살았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임금님은 나라 전체에 금주령을 내렸습니다.

“먹을 양식으로 술을 빚어 팔거나, 이를 즐겨 마시는 자들은 엄하게 벌하도록 하라.”

임금님의 명을 받은 관청에서는 전국에 방을 붙여 모든 백성에게 알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막에서도 밥장사나 잠자리는 제공하지만, 술은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밀주를 만들어 몰래 팔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숨어서 마셨습니다.

임금님의 귀에 밀주를 만들어 팔고 마시는 사람들 이야기가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은 몰래 믿을만한 선전관을 불러들여 특명을 내렸습니다.

“선전관이 암행하여 밀주 만드는 자들이나 술을 마시는 자들은 반상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붙잡아 들이도록 하라. 앞으로 닷새의 말미를 주겠다. 단 한 명이라도 잡아 드리지 못하면 그대의 목이 온전치 못하리라.”

임금님의 엄명을 받은 선전관은 그날부터 변장하고 저잣거리를 돌며 밀주를 만들어 파는 곳을 수소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닷새가 다 되도록 단 한 건도 건지지 못하였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선전관은 어느 허름한 주막에 앉아 서편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며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하룻밤만 새고 나면 임금님 앞에서 목이 달아날 신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고민이 있기에 그리 큰 한숨이시오?”

주막 할멈이 딱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마침 주막에는 손님이 선전관 밖에 없었습니다.

“할멈, 내가 내일이면 죽을 목숨이라오.”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시오?”

“내막은 알 필요 없고, 하룻밤만 새고 나면 반드시 죽게 돼 있으니 참 하늘이 원망스럽소. 죽기 전에 딱 한 가지 소원이 있긴 한데…….”

선전관은 그러면서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소원이란 게 대체 뭐요?”

이때 선전관은 전대에 차고 있던 엽전 꾸러미를 풀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술이라도 한잔 먹고 싶은데 금주령이 내렸으니 어쩌겠소? 내일이면 죽을 목숨 돈이 있은들 또한 무엇을 하겠소?”

선전관의 얼굴을 살피던 주막 할멈이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내가 밀주를 만들어 파는 집을 알고 있는데,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죄를 짓더라도 죽을 사람 소원이야 못 들어주겠소?”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전관의 돈에 탐이 난 주막 할멈은 치맛말기 속에 술병을 감추고 신바람이 나서 어디론가 달려갔습니다.

선전관은 몰래 주막 할멈의 뒤를 밟았고, 드디어 밀주를 만드는 집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다. 어서 밀주를 항아리 채로 마당에 내놓아라.”

밀주를 만드는 집은 오막살이 초가집이었는데, 때마침 그 집 방안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나리!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주인 할멈이 마당에 나와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먼저 밀주를 만들어 팔아 서방님 공부 뒷바라지라도 하자고 했잖아요. 나리, 제 잘못입니다. 저를 잡아가십시오.”

부엌에 있던 아낙도 나와서 애걸하였습니다.

그때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선비가 나와, 저간 사정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선전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가장인 제 잘못이 큽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저를 위해 몰래 밀주를 만들어 팔았던 모양입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제가 가장이니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잡아가십시오.”

선전관은 매우 난처해졌습니다.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호구지책으로 밀주를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허헛, 참! 어명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열녀와 효부와 효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닷새 안에 밀주 만드는 범인을 잡지 못하면 내 목이 달아나게 되어 있소만, 오늘은 내 눈이 멀어 그대들을 보지 못하였소이다. 할 수 없이 내일 아침에 임금님께 내 목을 바칠 수밖에.”

선전관은 허탈한 심정으로 그 집을 나섰습니다.

“우리 때문에 나리께서 목숨을 내놓다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를 잡아가십시오.”

젊은 선비가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오늘은 내 눈이 멀었다 하지 않소?”

“정 그렇다면 함자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제가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선비의 이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선전관은 대꾸 없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음 날 선전관은 임금님 앞에 나가서 호된 꾸지람을 받았고, 범인을 잡아 들이지 못한 죄로 멀리 지방 군수로 좌천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지방을 순시하다가 선전관이 군수로 있는 고을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이방의 잘못으로 나라 재산을 축낸 일 때문에 군수에게 죄를 묻게 되었습니다.

“죄인은 얼굴을 들라.”

어사가 명을 내렸습니다.

군수가 얼굴을 들자, 어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와 아내가 자신을 위해 밀주를 만들어 팔 때 은혜를 입었던 바로 그 선전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사는 급히 달려가 군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몇 년 전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선전관 나리 아니십니까?”

그때야 군수도 어사가 된 선비의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어사는 군수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 대신 이방에게 호된 꾸지람을 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였습니다.

 

☞ 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진정성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은혜를 주면 반드시 은혜로 그 보답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