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를 읽은 것은 2007년도이다. 머리를 치게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카프카는 “좋은 책은 도끼와 같다.” 했듯이 이 책은 도끼다. 김규항의 어느 책이 도끼가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이 책은 내가 처음 접했던 ‘김규항’이었기에 그 충격이 가히 컸다. 짧은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으로 계속되는 김규항의 책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책도 그런 형식을 유지한다. 이 책에서는 연도별로 정리된 김규항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김규항이 말하는 공감과 감동의 아포리즘으로 들어가 보자
(2001년)
-한국에서 국가의 야만이 가장 충실한 곳이 군대와 학교다.
-진리는 쉽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건 진리가 아니다.
-굶어 죽어가는 제 형제를 외면한 채 오늘은 무얼 먹어 이 권태로운 창자를 달랠까 고민하는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 앞에 큰 죄인이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주장되는 상점'이다. 한국교회에 남은 일은 예수가 성전에서 하느님을 빙자한 장사꾼들을 내쫓았듯 예수를 빙자한 장사꾼들이 내쫓기는 일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논평자들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논평했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어 조선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논평의 실제는 이렇다. "일본 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건 어리석은 꿈이다. 현실적인 타협만이 살길이다."
-희한한 일은 오늘 상황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다. 고작 식민지 출신인 그들은 마치 제국주의 출신이라도 되는 양 오늘 상황을 철저하게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의 집합인 서방의 시각으로 본다. 요컨대 한국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테러도 나쁘지만, 보복도 나쁘다"라는 지당한 말들이나 주고받는다. 너무나 지당해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런 말들을~
-"똥을 누면서 나는 내가/아래위로 구멍 뚫린/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아하! 내가 통이다/내가 걸어 다니는 통이다"-이현주 목사
-9.11은 어느 호사스러운 서양학자의 말처럼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부시의 말처럼 '자유에 대한 침범은 더더욱 아니며 단지 '오랜 일방적 가해자가 당한 뒤늦은 최초의 보복'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가해자의 무소불위한 권세 덕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한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쁘다"라는 지당한 말씀이나 읊조리는 일은 동네 양아치의 싸움 앞에서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따지는 파출소 순경보다 한가롭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세상의 모든 지점에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것이다.
-노신;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2002년)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학술 심포지엄이니 토론회니 이름 붙은 행사들은 대개 가장 진지한 형태의 코미디들이다.
-내가 그 페미니즘을 마땅찮아서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회의식'이,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에서 출발하면서도 모든 건강한 사회의식이 갖는 인간해방운동의 보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보수란 오늘 세상을 지키려는 생각이고 진보란 오늘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복잡한 현대사회구조 속에서 반드시 고쳐져야 할 부조리와 모순은 은밀히 감추어져 있어 잘 드러나지도 않고 알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 국가나 세계 같은 거대 사회의 문제에선 믿을 수 없을 만치 보수적인 경우를 보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그런 슬픈 부조화를 물리치는 힘, 자기가 속한 사회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교양'입니다. 제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양이 부족하다면 단지 '보수의 개'로 살게 됩니다. 거칠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기 때문입니다.
(2003년)
-종교적 평화는 다른 이의 신앙을 '같은 정상을 향하는 다른 등산로'라 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송두율이 노동당원이면 어떻고 민노당원이면 어떤가. 송두율이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어떻고 남한으로 들어오면 또 어떤가. 그런 건 분단 덕에 영화를 누려왔기에 분단이 영원하길 바라는 놈들에게나 상관있는 일이다. 분단 조국을 둔 지식인이 남북을 넘어 민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독일이라는 제3국에 거주하는 지식인이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 파시즘이 지배해온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지식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송두율의 이런저런 행적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드러낼 뿐이다. 누가 감히 추방을 말하는가. 누가 감히 관용을 말하는가. 이 더러운 공화국에서.
-아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어른이라 불리는 인간들과 가장 다른 점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혹은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혹은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야말로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한국인들의 절대적 이념이다. 지성이나 예술 혹은 종교 따위는 그 절대적 이념 아래 무수한 장식물로 존재한다. 한국인들, 한국의 어른들에게 더는 희망이 없는 건 그래서다.
-텔레비전: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텔레비전 느낌표에 방영을 녹색평론이 거부. 권정생도 거부.
(2004년~2005년)
-주일성수(主日聖守).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 일요일에 다른 일 말고 꼭 교회에 가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걸핏하면 안식일을 어기곤 했다. 바리사이인들이 예수에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따졌다. 예수가 대꾸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2:27)
-민주화가 된 오늘 그 시절은 종종 이렇게 표현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의 폭압에 신음하던 국민"-아픈 상처를 보듬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말은 과장된 것이다. 그 시절에 '신음하던 국민'이 몇이나 되었던가? 대개의 한국인은 그저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자식에게 공부 잘하라며 조용히 살았다. 대개의 국민은 신음하는 소수를 '세상모르는 사람들'이라 여겨가며 오순도순 평범하게 살았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 즉 지배계급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은 역사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제 식구 챙기며 사는 것이다. 그들이 파시즘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적극적인 반발도 적극적인 동의도 아닌 순응이다. 파시즘이 뭔지 알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이 파시즘 치하에서 반발도 동의도 하지 않는 걸 비평할 순 없지만 그런 태도가 결국 파시즘을 보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대열을 이루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성은 이제 한국인들의 삶이 되었다. 모든 일과를 마친 밤 인터넷에 모여앉아 온 세상을 '종합평론'하는 그들은 마치 세상을 만들어가는 듯하지만 (자본과 지배계급은 늘 그들을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부추긴다) 실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되새길 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수십 년 전 복덕방에 모여앉아 "대중이가 말야" "영삼이가 말야" 하며 '세상을 만들어가던' 영감들을 빼닮았다.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들 가까이에 있지만 스스로 세상을 다 아는 그들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영감들이 신음하던 소수를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듯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광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태'라면 사태인 줄 알고 '항쟁'이라면 항쟁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무식하다고 합니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의 학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한국사회는 갈수록 그런 무식한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눈물이 난다>
행군하는 군인들을 보면
이 같잖은 나라도 조국이랍시고
어머니도 동무도 애인도 다 두고 끌려와
개처럼 행군하는 청년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전쟁은 언제나 '조국의 이익'을 빌미로 벌어진다. 조국의 이익은 언제나 전쟁을 벌이는 놈들의 이익이다. 말하자면 전쟁이란 가진 놈들이 좀 더 갖기 위해 제나라의 없는 집 자식들의 목숨을 팔아서 벌이는 장사놀음이다.
-성교육: 아이들은 언제나 성에 대해 어른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든 어른이든 성 문제는 개인적인 것이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밤의 주둥아리들=네티즌들
-지적 갈증? :한국에서 지적(知的)이란 말은 무엇보다 '보통사람들이 못 알아먹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언어는 본디 학술적 소통을 위해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이다. 학술적인 소통의 효율과 정확성을 위해서 그런 '전문적인 임시 언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언어들이 학술적인 소통 밖을 떠돌며 지적'권위'를 행사하거나 먹물들이 보통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하는데 사용되는 건 참으로 재수 없는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진리는 쉬우며 쉽지 않다면 진리가 아니다.
-개미지옥: '당연히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인생의 함정'인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우 '결혼'이 그렇다. 믿을 수 없이 많은 똑똑한 여성들이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처럼 그 함정에 빠져 파괴되어 간다. 미혼 여자들과 결혼에 관해 대화하게 되면 부러 조금은 과격하게 말하곤 한다. "결혼은 여성이 가부장제에 자신을 봉헌하는 절차다. 가장 좋은 남편이란 가부장제의 가장 좋은 관리인이기도 하다. 가장 기초적인 결혼준비는 가사노동분담에 대한 상세한 규칙을 정하는 일이다. 어떤 그럴싸한 이유로도 일을 포기해선 안 된다." 등등~
-못된 아들: 명절이 되면 못된 습속이 건재를 과시한다. 뼈대가 있다는 집안일수록 더 그렇다. 하여튼 나라고 집안이고 뼈대란 뼈대는 다 무너져야 한다. 어머니는 세배를 받고는 "일흔이 되니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개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다. 너희들은 그렇게 살길 바란다."라고 하셨다. 우리도 처음에는 고부갈등이 많았다. 그럴 때 나는 아내 편을 들었다. 아내는 혼자 남의 집에 들어온 소수자(약자)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머니가 그런 나를 보고 처음에는 '못된 아들'이라고 하셨다. 부디 내 아들은 나보다 더 못된 아들이 되고 내 딸은 나보다 더 못된 아들을 만나길 바란다.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이란 학벌이나 재산, 혹은 사회적 지위 따위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인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주체적인 가치관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 그들을 완전하게 지배한다. 요컨대 평범한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세상이란 게 그런 거지…." 평범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뭔지 세상이란 게 뭔지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뭔지 세상이란 게 뭔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외식, 아파트, 차' 같은 것에 두게 되며 완전하게 지배된다.
나는 왜 불온한가/김규항/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