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한 그릇의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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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한 그릇의 보은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2.07.16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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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왕손으로 대를 이어온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를 지나면서 가세가 기울어 끼니조차 잇기 힘이 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대갓집이어서 기와집 하나는 번듯하였는데, 관리하지 않아 기와지붕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돋아나고 버섯이 다 자랄 정도였습니다. 집 뒤에는 다 쓰러져 가는 사당이 있었는데 큰 홰나무 여러 그루가 자라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궁색한 대갓집에 어느 날 탁발승이 하나 찾아들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집안이 궁색하여 시주할 식량이 없습니다.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실정이니 다른 집으로 가보시지요.”

주인이 나와 정중하게 두 손을 합장하고 절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곡식이 아니라도 좋으니 저녁 끼니나 때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길을 잘못 들어 깊은 산 속에서 헤매다 보니 온종일 굶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탁발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역시 허리를 굽혔습니다.

“식은 죽이라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주인이 보기에도 금세 쓰러질 듯 허기진 탁발승을 얼른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때는 겨울철인데, 방이 냉방이었습니다. 군불을 땔 나무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탁발승은 냉방에서 맛있게 식은 죽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떠나기에 앞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보아하니, 이 댁은 옛날 대갓집이 틀림없군요. 저 집 뒤의 홰나무에 가린 집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저 건물은 우리 중시조 되시는 대군의 사당입니다. 옛날에는 명색이 왕손이었는데,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이렇게 몰락한 집안이 되고 말았지요.”

탁발승은 한참 동안 머리를 끄덕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허허, 대군 집안이 불과 몇 대만에 이렇게 몰락하다니. 소승이 죽 한 그릇 보시를 받은 고마움의 표시로, 주인장의 가세가 훤히 트이게 해드리리다.”

“아니 매일 죽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판인데, 무슨 수로 가세가 트이게 해주신단 말씀입니까?”

주인은 탁발승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딱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틀림없이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허헛, 참! 대체 어떤 방도가 있다는 말씀인지요?”

탁발승의 말에 주인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일단 들어나 보자고 생각하였습니다.

“저 큰 홰나무들은 누가 심은 것입니까?”

“그야, 중시조 되시는 대군께서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심으셨지요.”

탁발승은 다시 한참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러더니 다음과 같이 방도를 일러주었습니다.

“저 홰나무들을 모조리 베어서 땔감으로 쓰십시오.”

“네에?”

“저 큰 홰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집안을 더욱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시 대군께서는 정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 살기 위해 그렇게 홰나무를 심으셨을 겁니다. 이제는 숨어 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므로 베어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탁발승의 말은 너무도 단호하였습니다.

“그래도 중시조께서 심으신 나무를 내 손으로 벨 수는 없질 않습니까?”

“일을 꾸미는 건 사람에 달렸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공연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한 번 시험 삼아 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저 큰 홰나무들을 베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탁발승은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주인은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탁발승의 말대로 사당 앞의 큰 홰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들은 잘라서 장작으로 만들어 쌓으니 한겨울 동안은 땔나무 걱정을 안 해도 될 듯싶었습니다.

“허헛! 그 스님이 냉방에서 자더니만 우리 집 땔감 걱정을 다 해주는군!”

주인은 그저 땔감이 생긴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임금님이 근처의 능에 행차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아주 오래된 사당을 보았습니다.

“내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봤는데 전에 안 보이던 사당이 보이는구나. 이런 곳에 저런 오래된 사당이 있다니, 그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아라.”

임금님은 행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 신하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는 곧 주인을 불러 임금님 앞에 대령하였습니다. 양반이긴 하였지만, 주인의 옷차림이나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저 사당의 주인을 대령하였습니다.”

신하가 말하자 임금님은 부복한 주인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의 자손이신가?”

주인은 자신이 원래는 왕손이며, 사당은 대군이었던 중시조를 모시는 곳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허허! 왕손인 그대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아서야 하겠는가? 짐과 피를 같이 나눈 사이거늘.”

혀를 끌끌 차던 임금님은 곧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다 쓰러져 가는 사당과 주택을 중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인 왕손에게 벼슬을 내려 잘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 이 세상에 우연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적에는 그에 합당할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