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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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2.05.1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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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이 책은 좋은 책이다. 특히 언제나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우리나라 같은 분단국가 사람들은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전쟁은 왜 일어나며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는 물론, 우리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전쟁에 대한 잘못된 생각, 즉 ‘전쟁은 때로 불가피하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인식의 계기를 이 책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에서 반공과 멸공만을 외치며 공산당을 때려잡는 일만이 삶의 목표라고 배워 온 우리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책이다. 전쟁의 실체를 알려면 전쟁을 작동시키는 내부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나아가 나의 실존에 대해 알아야만 전쟁이 얼마나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고 허망하게 내 삶을 무너뜨리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전쟁 억제는 남성 중심형 국가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전쟁이란 고도의 전문화된 두뇌집단이 깊은 연구와 성찰 끝에 내리는 과학적이고 불가피한 결론이 아니다. 역사상 전쟁의 원인을 살펴보면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전쟁은 일어난다. 1, 2차 세계대전이 그랬으며, 한번 일어난 전쟁은 수십만, 수백만의 무고한 백성들을 그들의 가족 품에서 앗아버리고 개인의 삶은 물론 한 가정의 단란한 행복을 송두리째 뺏어간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죽어가는 게 전쟁이다. 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전쟁억제를 위해 젠더의 역할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말해 여성들이 깨어나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저자 생각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절박한 위기에 처한 현대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전쟁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가부장제 남성지배형 국가’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쓰였다. 전쟁은 야쿠자의 폭력과 달리 국가가 합법적으로 행하는 폭력이므로 정당하다는 생각의 잘못을 지적한다. 현명하고 진보한 인간이 어째서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그만두지 못할까. 답은 간단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전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젠더로서의 남성이다. 그러나 젠더로서의 남성이라는 인식, 즉 남녀가 선천적으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은 어떤 강력한 목적 아래 구성되고 유지되어온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이 젠더라는 틀 때문에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모시고 식사를 준비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원로원 의원도 단테도 괴테도 될 수 있었다. 괴테가 괴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젠더 질서를 만들고 지켜왔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질서에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경우는 가부장이고 국가에서는 권력자다. 이들은 동시에 가부장이기도 하므로 이런 지배 체재를 가부장제 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조차도 노동자의 해방과 만인의 평등을 외쳤지만 젠더 해방에는 미치지 못했다. 되풀이하지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자신의 인생과 사회 활동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수행할 능력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사회적인 혁명보다 훨씬 어렵다. 기존의 남성 중심형 국가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젠더 평등은 여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남성지배를 말하기 위해서는 젠더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가진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사실 그런 인식의 구조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걸 조장하고 유도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부장제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제가 실은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시적인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적출자를 낳고 기르는 가족의 형태도 역사적인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의 모계제 사회에서는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류사회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된 것은 진보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부계사회종족이 모계사회종족을 침략 지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지적한다. “젠더 관념의 구분으로 이익을 보는 남성에 의해 젠더의 평등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젠더 평등은 여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젠더의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신체소유권에 대해 회복을 하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어머니가 되기를 강요당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역사상 처음으로 아기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전쟁 그 비극의 시작은 바로 이와 같은 젠더 분업에 기인한다. 젠더 분업은 가부장제를 낳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애정이나 배려 같은 인간적 특질의 발달이 저해되고 사적 영역에서는 포악함과 폭력을 공적 세계에서는 최악의 전쟁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의 역사는 성폭력의 역사다. 동물 세계에서 강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남녀평등에 반대한다는 말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전쟁에 찬성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국가에 전쟁이 필요한 때는 언제나 조국애를 강조해왔다

모든 전쟁의 구호는 역설적이게도 평화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여러 가지로 도식되고 위장되고 포장된 세뇌로 국민을 죽음의 구덩이로 당당히 밀어 넣는다. 전쟁을 부추기고 미화하는 말들은 곳곳에 살아있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은 바로 가족주의 개념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간다는 말은 전쟁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나아가 국가는 가족이고 권력자는 국민의 아버지이며 국민은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기쁘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구호의 우매성을 알아야 한다. ‘어머니 대지‘, ’모국’이라는 단어, ’나라를 위해 싸우는 남자다움‘ 이 모든 언사가 전쟁을 미화하는데 동원되는 말들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자신의 국가를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이야말로 전쟁의 원흉이라고 지적한다. 모국이라는 말은 모든 나라의 내셔널리스트가 애용하고 있다. 국가에 전쟁이 필요한 때는 언제나 이런 조국애가 강조되었다.”

1813년의 <독일 병사를 위한 교리문답>에는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위해 싸우는 병사와 시민은 하나다. 병사는 싸우는 시민이고 시민은 잠재적인 병사이며 모두 조국의 방위라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을 지고한 가치로 생각하고 숭배하는 이러한 국민 신화는 전쟁이나 위기의 시대에 특히 지속해서 작용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여자와 젊은이가 아니다. 자신들은 절대로 전쟁에 나가지 않는 지배층 남자들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그의 저서 <공격행위에 관하여>에서 말한다, “어린아이를 야단조차 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로켓이나 폭탄투하의 단추를 눌러 몇백 명의 아이를 불태워 죽일 수 있다. 선량하고 예의 바른 한 가족의 아버지들이 살인의 융단폭격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는 전쟁에 대한 여러 학자의 고찰을 살펴볼 수 있다.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는 “평화란 전쟁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란 친구와 적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즉 정치가 없는 세계다.” 국가는 터무니없는 권한을 손에 쥐고 있다. 그것은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을 통해 공공연히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가능성이다.

샘 킨의 <적의 얼굴>에는 “인간은 적대하는 종족, 다시 말해 적을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적대하는 정신구조이므로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세계의 수많은 전쟁 가운데 가장 잔혹했던 전쟁은 다른 인종과의 전쟁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경멸과 비인간화가 개입할 때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 아니라 인종학살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나타난 원전은 바로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이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괴물로 이는 곧 국가를 가리킨다. 헤겔은 군사국가의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바다는 평온하면 부패한다. 바람은 바다가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평화가 계속된다면 부패를 피할 수 없다”

니체는 호전적이었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긴 전쟁’과 ‘짧은 평화’다. 평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은 새로운 전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치가 니체를 좋아했던 것은 당연하다. 마오쩌둥에 따르면 “세계에는 두 가지 전쟁이 있는데 하나는 정의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의 전쟁이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

참된 평등은 여성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야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현대사회의 불합리와 불평등, 인간성을 파괴하는 물질적 욕망, 물질을 둘러싼 만인의 경쟁 등은 모두 자본주의의 해악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15세기 말 유럽에서 생겨났다. 이 체제는 그 후에도 공간적으로 계속 발전해 19세기 말에는 지구 전체를 뒤덮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모두 경제적 노동력의 일원으로 간주하지만 주부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여성의 가사노동은 무상이다. 성차별은 이렇게 제도화되었다. 병도 없고 쇠약하지도 않은 노인이 노동에서 은퇴하게 된 것도 모두 자본주의 체제가 되고부터다.”

참다운 남녀평등을 위해서 여성도 병역의무를 지거나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참된 평등은 여성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야 한다. 나쁜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 나쁜 일을 없애는 것이 평등의 기본개념이다. 즉 진실한 해방과 평등은 전쟁에 참여해서 부분적인 평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군사국가와 전쟁 자체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에 대한 사랑을 여성의 영역에서 해방해 인류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남녀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제 평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창출이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안전보장이란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분쟁이나 적대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군사적 안전보장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평화운동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젠더의 평등성과 비폭력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 그동안 지속해온 가부장제는 여성의 연대를 통해 국가보다 빨리 허물어뜨려야 할 과제다. 그것이 전쟁을 없애고 인간의 평등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와카쿠와 미도리/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