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명쾌한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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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명쾌한 판결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2.01.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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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주는 가족 동화

 

옛날에 어진 정승이 있었는데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해 양자를 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자식을 많이 둔 먼 친척들이 각자 자신의 나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상경하였습니다.

정승은 곧 어린 소년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여 양자로 앉힐만한 재목인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년들은 겁을 집어먹고 묻는 말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주 초라한 옷차림을 한 소년이 정승 앞에 불려나왔습니다.

“그래, 넌 어디서 온 누구냐?”

정승이 묻자, 그 소년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더니 목이 마릅니다. 목이나 축인 후에 대답하겠습니다. 먼저 냉수 한 그릇만 주십시오.”

당돌하기 그지없는 소년을 보고, 때마침 그 곁에 서 있던 정승의 가까운 친척이 소리쳤습니다.

“어린 것이 대감님 앞에서 너무 무엄하구나. 저 녀석을 당장 내쫓아라.”

하인들이 소년을 데리고 나가려고 하자, 정승이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내버려 두어라. 저 아이의 말이 옳지 않느냐? 얼른 냉수 한 사발 갖다 주거라.”

정승이 자세히 소년을 살펴보니 시골에서 자라 예의범절에 미숙할 뿐, 아주 영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소년을 양자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매일 노는 데만 신경을 쓸 뿐, 도통 공부를 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따로 독선생을 앉혔지만,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밖에 나가 놀려고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승은 소년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얘야, 내가 조정에 나가 일을 보고 올 동안 여기 있는 쌀 한 말을 다 세어 놓아라. 내가 집에 돌아와 쌀알이 얼마나 되는지 묻겠다.”

정승은 조정을 나가면서 쌀 한 말을 한 톨 한 톨 다 세려면 하루해를 가지고도 모자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쌀을 세느라 밖에 나가 놀 시간이 없으니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정승이 조정으로 나가고 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인이 펄쩍 뛰며 말했습니다.

“도련님, 밖에 나가면 안 됩니다. 쌀 한 말을 다 세려면 하루해를 가지고도 모자랄 지경인데, 밖에 나가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이번에 대감님 말씀을 어기면 큰 벌이 내려질 거예요.”

하인의 이 같은 말을 듣고도 소년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알아. 한나절 놀고 들어와서 쌀알을 세도 늦지 않아. 쌀 한 말이 얼마나 된다고?”

소년은 하인이 더 이상 말릴 틈도 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한나절 동안 실컷 놀고 돌아온 소년은 하인에게 작은 됫박 하나와 저울을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도련님, 저울은 뭣에다 쓰려고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소년은 하인이 작은 됫박과 저울을 가져오자 쌀 한 말을 앞에 두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쌀 한 되를 덜어 저울로 무게를 달았습니다. 그렇게 쌀 한 말을 되로 나누어 똑같은 무게로 맞춘 뒤, 한 되 분의 쌀알을 세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승이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쯤 소년은 쌀알 세는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쌀알은 다 세었느냐?”

정승이 물었습니다.

“네, 쌀알의 숫자는 이 종이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소년은 숫자가 적힌 종이를 정승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쌀 한 말을 하루 만에 다 셀 수 있었느냐?”

“우선 쌀 한 되를 덜어 저울로 무게를 잰 다음 쌀알을 세었습니다. 그런 연후에 처음 됫박으로 잰 저울의 무게만큼씩 한 말의 쌀을 모두 달아 그 숫자와 한 됫박의 쌀알 숫자를 곱한 것이옵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정승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영특한 아이로구나! 그런데 너는 정승과 도둑의 차이를 아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정승과 도둑은 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머리가 영특하다 하더라도 지혜를 잘 쓰면 정승이 되고, 잘못 쓰면 도둑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지혜를 잘 쓰려면 배워야 한다.”

소년은 정승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습니다. 그 후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정승은 살인사건의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세 명의 도둑이 한 자리에서 죽었는데,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소년이 정승에게 물었습니다.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는데,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구나.”

“어떤 사건인지요?”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한 방에서 도둑이 세 명 죽었다. 한 명은 칼을 맞았고, 두 명은 술을 마시다 죽었다. 술 마시다 죽은 두 명의 몸에서는 돈 꾸러미가 나왔다. 도무지 이것만 가지고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가 어렵구나.”

정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년이 말하였습니다.

“범인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도둑 세 명 모두가 살인범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도둑 세 명이 결탁하여 남의 집 돈을 훔쳤습니다. 세 사람은 술을 마시기로 하였고, 그중 한 사람이 술을 사러 갔습니다. 이때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돈에 욕심이 생겨 술 사러 간 도둑을 죽이고 둘이서만 돈을 나눠 갖자고 하였습니다. 술을 사러 간 사람이 돌아오자 두 사람은 계획대로 그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한편 술을 사러 간 사람은 혼자서 돈을 독차지하기 위해 술에 독을 타 두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사러 갔다 온 사람을 죽인 두 사람은 술에 독을 탄 줄 모르고 마시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정승은 명쾌한 추리에 놀랐습니다.

소년은 나중에 커서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며,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려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 지식은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것이고, 지혜는 어떤 일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날 선 칼과 같아서 잘 쓰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칼이 되고, 잘못 쓰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