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어린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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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어린 왕비
  • 엄광용 작가
  • 승인 2021.12.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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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의 차이

 

옛날 나이 많은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님은 너무 외로웠습니다.

신하들은 그런 임금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왕비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하여 조정 논의를 거쳐 간택령을 내렸습니다. 간택이란 곧 새로운 왕비를 뽑는 행사였습니다.

나라에서 간택령이 내려지면 양반가 처자들은 일체 출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양반 처자 중 누가 왕비로 간택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택은 세 번의 심사를 거쳐 왕비를 뽑는 까다로운 절차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절차에서는 임금님이 직접 나와 심사를 하였습니다.

연로한 임금님은 두 번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뽑혀온 열대여섯 살 먹은 처녀들 앞에 나갔습니다. 처녀들이 지정한 자리에 다소곳한 자세로 방석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처녀만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난 바닥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임금님이 가장 먼저 그 처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지정한 방석을 비워두고 물러앉아 있는 건가?”

“예, 소녀는 아비의 함자 위에 감히 올라앉을 수가 없사옵니다.”

처녀의 말에 임금님은 방석을 쳐다보았습니다.

방석마다 왕비의 예비후보로 올라온 처녀들 아버지 이름이 벼슬과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석에 올라앉게 되면 그 이름을 깔고 앉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허허허, 딴은 그렇도다.”

임금님은 흰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임금님의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일꼬?”

이 질문에 지명을 받은 처녀들은 각기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물이 가장 깊습니다.”

“산골짜기가 깊습니다.”

그런 답변들이 나왔습니다.

“그대는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깊다고 생각하는고?”

방석을 비켜 앉은 처녀에게 임금님이 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생각하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고?”

“물건의 깊이는 무엇으로든 잴 수 있사오나,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나이다.”

처녀의 대답에 임금님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꽃이 가장 좋을꼬?”

임금님의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모란꽃입니다.”

“연꽃입니다.”

지적받은 처녀들은 각기 개성에 맞게 좋아하는 꽃 이름을 대었습니다.

“그대는 무슨 꽃을 좋아하는고?”

방석에서 비켜 앉은 처녀에게 다시 임금님의 질문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목화꽃을 좋아하옵니다.”

“목화꽃이라?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는고?”

임금님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습니다.

“예, 다른 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한때밖에 꽃을 피우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면화는 온 백성의 옷이 되고 이부자리가 되어 따뜻하게 해주므로 그 공이 매우 크옵니다.”

처녀의 대답은 임금님뿐만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던 신하들까지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기와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매우 요란하여, 그리로 눈길을 주던 임금님이 문득 세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기와의 골이 몇이나 되는지 말해보라.”

그러자 처녀들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기와 골의 수를 세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방석에서 비켜 앉은 예의 그 처녀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고개를 들어 기와 골을 세지 않는고?”

임금님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감히 전하 앞에서 무엄하게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낙숫물이 떨어진 땅바닥의 구멍을 세고 있었습니다.”

처녀는 그러면서 정확하게 땅바닥 구멍 수로 기와의 골이 몇 개인지 정확하게 맞추었습니다.

임금님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 지혜가 놀랍도다.”

임금님은 방석에서 비켜 앉은 처녀를 왕비로 간택하였습니다. 손녀딸보다 어린 왕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처녀는 왕비 수업을 받으면서, 곧 있을 대례식 때 입을 왕비의 옷을 짓게 되었습니다.

의복을 짓는 늙은 나인이 아직 예비 왕비인 처녀에게 찾아와 앞품, 섶 길이, 소매 넓이 등을 쟀습니다.

“뒤품을 재야 하니 잠깐 돌아앉으시지요.”

늙은 나인이 말하자, 예비 왕비가 당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돌아가면 안 되겠는가?”

그 바람에 늙은 나인은 뜨끔하여 허리를 깊이 꺾었습니다.

“황공하옵니다.”

대례식을 치르고 났을 때, 임금님은 새 왕비의 몸에서 왕자를 얻고 싶어 내의원에 약을 달여 대령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자신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세손이 있음을 알고, 약을 먹는 척하며 몰래 쏟아버리곤 하였습니다. 자신이 왕자를 낳으면 임금의 자리 문제로 궁중에 편할 날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총명하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지혜롭기까지 해야만 총명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머리가 좋아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다면 총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다름이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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