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을 보고 읊다(詠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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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을 보고 읊다(詠桐)
  • 曠坡 先生
  • 승인 2021.11.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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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소리에 가을이 깊어가네

 

           벽오동을 보고 읊다(詠桐)

 

막막음성악(漠漠陰成幄)/넓고 큰 그늘이 장막을 드리웠고

표표엽산규(飄飄葉散圭)/나부끼는 나뭇잎은 홀처럼 흩어져

본인고봉식(本因高鳳植)/본래는 봉황새를 보려고 심었는데

공유중금서(空有衆禽栖)/공연히 잡새들만 무리지어 깃드네

 

사진=박원 작가
사진=박원 

 

*계절의 깊이

고려 무인정권 시대를 살다간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시입니다.

늦가을 벽오동을 보고 읊은 시이지만, 실상은 시인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규보는 23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얻지 못하여 개경 인근의 천마산에 들어가 스스로 ‘백운거사’를 자처하며 시를 읊고 지냈습니다.

‘벽오동’은 봉황이 깃든다는 나무로 벼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2구에 ‘홀처럼 흩어진다’는 표현은 시인 자신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함을 한탄하는 대목입니다. 애써 ‘홀 규(圭)’ 자를 쓴 것은 자신의 이름자인 ‘별 규(奎)’ 자와 일치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홀’이란 벼슬아치들의 품계를 구분해주는 상아로 된 물건입니다.

‘봉황새’가 아니라 ‘잡새’가 된 시인의 마음은 늦가을 벽오동의 마른 나뭇잎처럼 허허롭게 떠돕니다. 어쩌면 가을을 보내는 마음은 그런 허허로움 때문에 더욱 계절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