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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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
  • 채동균 대표
  • 승인 2021.10.1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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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체험 수기
한양도성 인왕구간 인근의 코스모스길, 짙은 가을 정취로 찾는 이가 많다.
한양도성 인왕구간 인근의 코스모스길, 짙은 가을 정취로 찾는 이가 많다.

 

서울에는 한양도성 성곽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흔히 한양도성 성곽마을이라 부르는 이 마을에는 마을주민이 함께할 소중한 기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서울특별시청 문화본부 한양도성도감 주관으로 진행하는 한양도성 성곽마을 공동체사업이다.

종로구 무악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양도성 성곽마을 중 하나의 마을로 인근에 한양도성 인왕구간을 접하고 있고, 북악 스카이웨이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지난 2018년부터 주민이 함께 공유지의 비극을 회복하여 공동체 공간으로 가꾸는 주민 모임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가 있다. 2021년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는 한양도성 성곽마을 공동체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몇 가지 실행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마을 길을 걷고 그 시간을 담는 ‘걷고담고 프로그램’, 도성 앞 농부의 배움터 역할을 하는 ‘행복원예 수업’, 그리고 <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을 기록하는 기록물 활동이 그것이다. 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은 혜윰뜰의 사업명이기도 하다.

한양도성을 벗 삼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정말 다양하다. 22개의 한양도성 성곽마을과 함께 교류하는 프로그램부터 전통 공예체험 활동, 역사 문화적 공간 탐방과 소개 프로그램 제작 등 한양도성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선택지는 넓다.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는 그중 하나로 공동체 활동과 이웃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 기록물 제작은 수많은 이웃이 함께한 것이기에 저마다 참여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참가자로서 <도성 앞 농부들의 늘 푸른 사계절> 제작에 참여하는 마음을 이웃 종로마을N 독자에게 전해보고자 한다.

 

2014년 어느 날 일이다.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이른 햇살 속에 이름 모를 새소리가 밤사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날아들어 아침을 여는 날이었으니, 여름이 이제 막 시작되는 요즘 같은 날이었지 않았나 싶다. 평소 전화를 잘 하지 않던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일 이른 시각이라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누구요?’

전화기 너머로 물음이 건너왔다. 전화를 거신 분은 당신인데,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 것에 마음이 아려왔다.

‘저에요, 아버지’

* * *

시간이 쌓여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도 시간 앞에서는 한 사람 몫의 책임과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때로는 나이 든다는 일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애쓰지 않아도 찾아올 인생의 마지막 장 만큼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일이기에 나이 든다는 일이 나쁜 느낌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간혹 누군가에게는 시간의 무게가 조금 더 가혹하게 쌓인다. 나의 아버지, 당신이 그러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어제의 기억을 남보다 조금 더 빨리 잊어가는 모습을 수년간 지켜보면서 당신에게 유독 가혹한 시간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전화하셨을 텐데 그 순간 당신이 전화했다는 것을 잊고서 수화기 너머의 내가 누군지를 묻는 모습에서 아무것도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나에게 무언가 사무치듯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제의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도, 언제나 잊지 않는 일들도 있었다. 내가 태어난 그해의 여러 가지 사건들, 먼 길을 내내 짊어지고 왔던 눈 오는 크리스마스 날 선물 받았던 커다란 그네, 큰 사고로 처참하게 누워 있던 나의 모습들. 아무리 시간이 기억을 앗아가려 해도 앗아가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한편으로는 그 기억 대부분이 힘들고 어려웠던 당신의 추억이기에, 때로는 차라리 잊으셨으면 하고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그 모습을 5년의 세월 동안 지켜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존재가 스러지는 과정이다. 오늘의 내 모습은 나의 선택과 결정, 행동과 말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과 행동은 어제까지의 내가 쌓아온 경험과 기억이라는 디딤돌의 판단력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기억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당신께서 소천하신 이후,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할 길을 찾다 시작한 것이 작디작은 마을 활동이다. 세상에 쓰임새 많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당신의 바람에는 조금도 다다르지 못하였지만, 작은 역할을 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당신이 남겨준 소중한 가치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능력보다 아주 무거운 짐을 감사한 마음으로 짊어지고 온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을 활동 도시농업공동체 혜윰뜰과 독서모임 책수다이다. 그 덕분에 함께 하는 마을 활동의 기쁨도, 무거움도, 아픔도 배울 수 있었기에 지나고 보면 그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 동행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 안에서 배울 수 있었다. 어려운 일 앞에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만큼 마음 따뜻한 일이 없기에, 마을살이의 따스함을 이곳에서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선물 같은 경험이다.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2020 여름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2020 여름

 

혜윰뜰과 다양한 마을공동체를 만나고 난 뒤, 언제나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일은, 같은 공간에 참여하는 누군가의 웃음, 행복, 기쁨, 재미로 채워져 가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 웃음 너머에 있는 결코 기쁘고 즐겁기만 하지 않은 일들까지도 소중하게 담아둘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기록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도성 앞 농부의 늘푸른 사계절>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손잡고 걷던 그 날을 기억한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맞잡은 손을 가끔씩 좀 더 꼬옥 쥐는 것이, 처음에는 걷는 것이 힘들어 그러리라 짐작했지만, 몇 번을 그러면서, 당신의 눈에 비친 내가 누구인지가 흐릿해질 때마다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꼭 쥐는 동안에는 또렷하게 알아봐 주는 그 눈빛은 길을 잃지 않으려는 당신의 마음 등대 같은 것이었으리라.

우리가 오늘 함께 한 이야기를 담은 글 모음이 다음의 누군가에게는 캄캄한 밤, 길을 찾아주는 작은 별빛처럼 빛났으면 좋겠다. 이 기록물이 누군가에게는 내일의 기억으로 전해지길 바라는 이 마음도, 함께 하는 이웃에게 전해지기를 조용히 소망해 본다. 

책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