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
상태바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1.08.26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이 책은 제목이 모순적이다. 죽음에 관해 어찌 유쾌한 명상이 가능한 일인가? 죽음이 유쾌한 명상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일이던가! 죽음은 인생의 끝이며 우리가 그 끝을 고민하는 것은 사실 그만큼 삶의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해 연구하는 것도 사실 그 과정인 삶을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해 전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살아 있는 우리는 모두 언제나 죽음에 관심을 놓을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살아 있는 우리 모두 중 누구도 죽음을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음에 대해 글을 쓴 저자도 당연히 죽음을 모른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죽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공자님도 미지생 언지사(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저자의 다양한 생각과 박학한 지식을 풀어놓는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고통에 대해 두려워한다. 나는 99살까지 살다가 2~3일 정도 앓고 자는 듯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하는 말들이 사회에 회자하고 있을 정도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다. 100세 시대에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보면서 누구나 나는 고통 없이 깨끗하게 죽기를 바란다. 저자의 말처럼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욕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또다시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채질한다. 죽음에 관해 공부한 저자는 고통 없는 죽음은 없다고 말한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모두 고통 속에 죽어갔으며 전우익 선생같이 생전에 고고한 모습을 보이던 현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여러 가지 고통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며 죽어갔다고 말한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우리 생은 3계(界) 6도(道)를 몇 겁이나 돌고 돈다고 한다. (3계: 욕계, 색계, 무색계. 6도: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신). 가히 우주의 신비만큼이나 오묘하고 인드라망처럼 무수하다. 불교의 이런 윤회설이 사실이라면 우리 생은 참으로 억겁의 세월을 통과한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목숨을 사느냐가 문제지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영원하며 무궁무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번 생에서 오래 살겠다는 욕망에 짧은 지구의 삶을 몸부림친다. 생에 집착할수록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오는 것은 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것이다. 구약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게 헛되도다>라는 말과 솔로몬의 말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모든 걸 대변한다.

그러나 삶이 허무하다는 것만으로 죽음이 요약되지 않는다. 그런 말이 오히려 인생을 허무하게 만든다. 허무함 속에는 허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기에 우리는 허무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으려고 헤맨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덧없음과 허망함의 속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내적 본질의 영원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라며 허무의 영원성을 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날이면 날마다, 그리고 시간이면 시간마다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주어진 그 순간에 그 사람만의 삶의 특수한 의미이다.”라며 죽음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카르페 디엠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우리는 고작 버킷리스트에서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한다. 생의 본질을 간과하면서 말하는 버킷리스트라는 것에 대해 저자는 일갈한다. “버킷리스트란 틀에 박힌 일상 속에서 무의미한 생을 살아온 중산층 샐러리맨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 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에 권정생 선생의 일화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도 많지 않다. 권정생 선생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 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평생을 병치레 약골로 살아온 선생으로서는 예쁜 도모꼬와 연애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을 진데 도모꼬의 냉정함이 평생의 앙금으로 남아 이런 안타까운 시를 만들어냈다. 이 시는 웃으면서 읽다가 결국 마음이 씁쓸해지는 시다. 본능과 야속과 안타까움 그리고 남자의 회한 등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런 마음은 결국 선생의 유언장에도 드러난다. 권정생의 유언장에는 자신의 인세에 대한 유언과 함께 남자로서의 소박한 소망이 담겨있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죽을 때 생각나고 후회하는 것은 이렇게 소박하고 간단한 것이다. 누구도 죽을 때 나라를 구하지 못했거나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좀 더 가까운 사람들과 즐겁게 살지 않은 것과 좀 더 자연 속에서 호흡하고 즐기면서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정말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잘 살아야 하는 삶에서 너무도 안타깝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온통 헛된 가치를 좇는 일과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일에 골몰한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넘치는 탐욕만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더 가지기 위해 빼앗고 싸우는데 몰두한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전쟁은 내집단 바깥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죽어도 조국은 영원하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나는 죽어도 좋다.’ 등 죽음을 미화하고 신성시하는 구호가 많을수록 위험한 사회다. 전쟁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무지는 편견을 낳고 편견은 무서운 증오를 낳는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무력행사는 신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스신화에 무녀 시빌레의 이야기가 있다.

<시빌레가 젊고 아름다울 무렵, 아폴론은 시빌레에게 구애하며 약속했다.

“내 사랑을 받아준다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소.”

시빌레는 손에 한 움큼의 모래를 쥐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모래알의 수만큼 오래 살게 해주세요.”

아폴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시빌레가 깜빡 잊고 놓친 것이 있었다.

오래 살게 해달라고는 했지만, 젊은 모습 그대로 살게 해달라는 말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시빌레는 결국 늙고 지친 몸으로 무수히 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다.

700년도 넘게 살고 나니 시빌레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였다.

“제발 나를 죽게 해주세요.”

오래 살고 싶은 소원을 이룬 시빌레의 그 후 유일한 소망은 죽는 것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죽음의 가치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녀에게 죽음은 축복이다.

노후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죽음이 있기에 생이 소중하다. 죽음 앞에 저항할 게 아니라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게 잘사는 일이다.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김영현/시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