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
상태바
과학혁명의 구조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1.08.12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우리 인간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그 원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주의 원리에는 어떤 법칙과 논리가 지배하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원리로 작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관한 연구는 결국 과학으로 귀결된다. 지금까지 인류가 밝힌 우주의 과학만큼만 우리는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은 어떻게 진보하고 발전했는가에 대해 과학사적 입장에서 관찰한 과학의 발전 변천사이다.

과학의 진보는 기존 패러다임을 부수는 과정으로 발전한다

일반인들이 이 책을 보게 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우리보다는 한 차원 높은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아집이나 욕망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거로 생각하는데, 이 책은 과학조차도 결국 학문의 범주에 머무르고 과학자들도 인간의 권력과 이익에 무관하지 않게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나의 과학이론으로 등장하는 그 과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된다. 모두가 굳게 믿는 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런 패러다임으로 굳어진 과학을 저자는 정상과학이라고 말한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지구는 둥글다’, ‘달은 지구의 위성이다’와 같은 과학이론이다.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이런 과학은 정상과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모두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다. 과학의 진보는 결국 이런 패러다임을 부수는 과정으로 발전한다. 저자는 이걸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며 그 과정은 많은 우여곡절과 험난한 역사를 거친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 일은 아니다. 어떤 분야의 학문이건 새로운 이론은 처음에는 저항과 반대에 부딪히지만 결국 모두에게 용인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학설로 자리 잡는다는 것은 모든 학문의 발전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도 그런 일들을 통해서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전혀 용인되지 않은 이론이었으며 신념과 목숨을 바꿔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평범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과학이론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학문과 달리 저자는 과학에서 특히 이런 과학혁명이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은 바로 과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술 분야에서의 새로운 형식이나 장르는 그 자체로 그저 새롭게 인정되면 그만이지 그런 사조가 생겨났다고 기존의 사조가 죽거나 파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이론들이 굳이 혁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것도 없이 생성하고 또 소멸하지만, 과학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곧바로 그전 이론의 폐기를 뜻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상과학을 신봉하며 종사하던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과학이란 곧 자신들의 퇴장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수용과 용인이 쉽지 않다. 그러나 과학도 하나의 역사이므로 진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과학의 진보는 직선적 발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이론이 죽어야만 성립되는 것이 과학적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은 그야말로 또 다른 과학이론이며 기존의 이론은 일부는 수정해야 하게 되지만 다른 많은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존의 세부이론은 여전히 살아남아 여러 가지 과학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직선적 발전이 아니라 입체적 다원적 발전으로 진보한다.

모든 새로운 것은 모든 기존의 것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운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펴낸 것은 1962년도이다. 처음 책이 발간되었을 당시 저자는 과학계의 많은 학자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의 개종만큼이나 어렵다고 비판한 것이 과학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토머스 쿤은 새로운 학설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자들은 수용하기 어렵지만, 신세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고 차츰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성장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어찌 보면 과학혁명의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인다. 모든 새로운 것은 모든 기존의 것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보는 항상 어려운 것이며 ‘올디스 밧 굿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말은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읽기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주제가 과학 이야기다 보니 예를 들면서 하는 설명도 결국 과학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예를 다 알고 우리가 읽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알 필요도 없는 과학사례들도 자주 등장한다. 그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과 방향만 놓치지 않고 읽으면 마지막에 이르러 뜻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요리책을 읽는다고 가정할 때 셰프인 저자가 드는 각종 식자재와 양념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고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그저 이 셰프가 어떤 요리를 말하려고 하는지만 파악하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내 인생에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이 책을 꼽는다. <코스모스>는 과학을 소재로 우주를 말하지만 결국 인문학이고 철학책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과학을 소재로 한 철학책이 어찌 감동적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찌 과학과 철학을 떠나 한 발짝이라도 인생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코스모스>의 광대한 철학적 우주의 지식은 내가 이 책을 읽는데, 절대적 도움이 되었다. 토머스 쿤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를 말하는 자리에서 엉뚱하게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말해버리는 나는 <코스모스>의 영원한 애독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근본을 모르고는 아무것도 안다고 할 수 없다. 결국, 과학이 그것을 알려준다.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S. 쿤/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