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탑골공원의 기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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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탑골공원의 기생들
  • 신영란 작가
  • 승인 2019.11.21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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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기생 월희 등 사상기생으로 몰려

기미년, 고종황제가 붕어하자 세간에 파다하게 퍼져나간 독살설은 일제를 향한 국민적 분노를 들끓게 했다. 3월 3일로 예정된 국장일을 맞아 황해도 해주 기생 몇은 무작정 경성행 열차에 올랐다. 비운의 넋이 된 임금의 마지막 행차에 절이라도 올리고픈 마음이 그녀들을 움직였다.

3월 1일 오후 2시가 가까울 무렵, 서울 지리도 익힐 겸 일찌감치 숙소를 나선 월희는 탑골공원 앞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대한독립 만세!”

하나 된 외침이 이처럼 가슴을 뜨겁게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월희는 그 함성 한가운데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월선과 그녀의 동료들이 시위대와 뒤섞여 만세를 외쳤다. 전국적인 기생 봉기의 도화선이 된 해주 기생 만세운동의 시작이다.

“감히 기생 주제에!”

일본 경찰은 이들을 사상기생(思想妓生)으로 간주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천한 직업이라 괄시받는 처지에 일반인보다 몇 배 더 혹독한 보복이 따를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 그럼에도 해주로 돌아간 월희와 월선은 해중월, 옥채주, 문형희 등과 합심하여 만세시위를 기획했다.

문제는 독립선언서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월희와 월선은 자신들이 한글로 지은 선언문 5,000장을 인쇄하여 기생들에게 배포하고 광주리 가득 태극기를 채워 거리로 나갔다.

1919년 4월 1일, 화려한 비단옷 대신 흰색 무명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그녀들의 의로운 봉기는 오가는 사람들을 뭉클하게 했다.

“기생들도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남녀노소 수만의 인파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생들은 기마 헌병에게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선두에 선 월희, 월선, 해중월, 문형희, 옥채주는 돌멩이를 주워들고 경찰서 유리창을 깨부수며 저항했으나 그악스런 헌병들의 말발굽에 치여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옥에 갇혔다.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나까무라 형사부장은 해주경찰서로 출장까지 나와서 매일같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시작은 가죽 채찍이었다. 휙휙, 굵고 짧은 바람소리를 내며 채찍이 몸에 닿을 때마다 연약한 살점이 터져나갔다. 비명을 지르면 머리통을 휘갈기고 거품 물고 쓰러지면 얼굴에 찬물에 쏟아 부었다. 깨어나면 다시 또 가죽 채찍이 날아오고 그러다 제풀에 흥이 깨지면 주리를 틀거나 대꼬챙이로 손톱 밑을 찔렀다.

이 모든 악행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나까무라는 돈 많은 지역 유지든 누구든 배후가 있을 거라 여겼다. 술이나 따르고 웃음이나 팔 줄 알았던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배후는 무슨 배후! 이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도 죄란 말이오?”

죽을 각오로 항변했다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었다.

“이것들 다시는 기생 노릇 못 하게 만들겠다!”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을 때마다 나무토막을 허벅지 사이로 쑤셔 넣고 불꼬챙이로 허리를 찌르고 겨드랑이 밑으로 밧줄을 묶어 천장에 매다는 등 사람으로선 차마 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죄가 있다면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죄밖에 없는 여성들이 고문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 여간수가 대신 사과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까무라는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하고도 기생들의 배후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월선, 월희, 해중월, 문형희, 옥채주는 각각 징역 6개월을 살고 나왔으나 그 6개월이 그냥 6개월이 아니었다. 문형희는 폐병으로 단명하고, 월선과 해중월도 끝내 해방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달라도 사인은 명백한 고문 후유증이다.

일제는 이른바 사상기생들이 치안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요정 단속령을 내렸으나 그녀들의 가슴에 일렁이는 불길마저 끄지는 못했다. 여성 의열단원으로 폭탄 제조에 기여한 대구 기생 한계옥, 수원 기생조합 봉기의 주역 김향화, 진주의 한금화, 통영의 이소선, 정막래 등 시민의 이름으로 구국의 대열에 합류한 그녀들의 작지만 큰 함성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삼일만세운동에 모여든 군중   출처-국가기록원
삼일만세운동에 모여든 군중 출처-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