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수호하는 인왕산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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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수호하는 인왕산 국사당
  • 오서아 기자
  • 승인 2021.06.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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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은 별을 향해 제사 지내던 조선의 제당이었다

 

오랜만에 홀로 인왕산을 올라갔다. 비탈지고 좁다란 계단을 밟으며 국사당 마당으로 들어섰다. 내림굿, 진오기굿 등을 보려고 민속답사 일행들과 이곳에 왔던 기억이 대략 십년 안팎 정도 되는 듯하다. 잊히지 않은 몇 장면이 닫힌 창호문 안에서 춤추다 흩어지고 가락 장단은 귓청을 울리다 새어나간다. 퇴락한 사당에 깔리는 적막함을 바라보며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 민속의 지난 자취들을 살펴본다.

 

인왕산(仁王山)에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神堂)이 있다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한국의 무속 신전(神殿)으로서 가장 대표적이고 유서 깊은 사당이라 할 것이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南山)의 꼭대기에 있었는데 1925년에 인왕산으로 옮겼다. 일본인들이 남산(南山)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이전을 강요했다고 한다. 국사당은 처음 어떻게 남산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국사당도 산신당⋅성황당⋅서낭당과 같은 당집인 것일까.

남산에서 이전하여 원형 복원한 인왕산 국사당. 국가 민속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1973.7.16.) 좌우 양끝의 2칸은 이전 후 새로 지은 것이다.
남산에서 이전하여 원형 복원한 인왕산 국사당. 국가 민속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1973.7.16.) 좌우 양끝의 2칸은 이전 후 새로 지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는 현 남산인 목멱산(木覓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였고, 태종은 호국의 신으로 삼아서 국가적 제의를 행하였다. 세종은 신주(神主)를 모신 국사당을 목멱사(木覓祠)라고 불렀다. 일반인의 접근과 제사를 금지시키고, 국가에서 직접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목멱신사(木覓神祠)라는 명칭의 사당이 목멱산 마루에 있었다. 매년 봄⋅가을로 북두칠성⋅남두성⋅노인성 등 별자리를 향해 제사하는 초제(醮祭)를 행하였다. 국사당은 본래 무격을 모신 당집이 아니라, 초제를 지냈던 국가의 제당이었다. 목멱산이었던 남산은 조선시대 수도의 주산이었던 북악산과 함께 중요한 국가 제의의 장소였다. 비나 눈이 내리기를 빌며 풍년을 기원하고 재해와 천재지변을 막고 왕도 및 도성 축조와 왕실의 수복과 승전 등 여러 목적으로 기양제(祈禳祭)와 기은제(祈恩祭)를 행하였던 곳이다.

한양의 목멱산, 《고려사》에 그 이름이 처음 나온다. 고려 때 김위제가 남경천도를 건의하면서 ‘개경 동남쪽 삼각산 남쪽의 목멱산’이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한자 목(木)은 남쪽을 뜻하고, 멱(覓)은 산악의 음을 취한 것이다. 순 우리말 ‘마뫼’ 또는 ‘말미’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국사당이란 명칭은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찾아진다. 아울러 무신도(巫神圖)에 대해서도 처음 언급하였다. 목멱산신(木覓山神)을 속칭하여 국사당, 음사(淫祀)라고 했다. 당시 목멱사에는 무신도와 신상(神像)이 있었고, 개인의 제사를 금지했지만 기도(祈禱)가 성행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초기에는 목멱대왕의 신위만을 모셨을 것이나 19세기 전반에는 무학대사⋅나옹⋅마마호구신⋅그 밖의 무신들도 섬기는 등, 국가적 제의와 무속신앙 행위가 국사당에서 병행되었다.

주민들은 국사당을 국수당이라고 한다

중서부 해안 지역이나 경상도 등지에서는 국수당⋅국시당 또는 국수봉⋅국시봉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대체로 국사(國師)의 어원을 구수(龜首)에서 찾는다. 마을 신당이 있던 산봉우리를 구수봉(龜首峯) 또는 당금⋅당그미라고 했다. 구수가 국수(국시)로, 이후 한자로 취음하여 국사가 되었다고 본다.

구수나 당금⋅당그미는 신(神)을 뜻하는 말이다. 신산(神山) 마루의 뜻을 지닌 구지봉(龜旨峯)의 구지와 같은 명칭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구지와 상통하는 어의(語義)일 것이다. 수로왕은 구지라는 산봉우리에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산정에 위치한 점으로 보아 국사당은 천신의 하강처, 즉 천제당이나 기우제장이 자리하는 신산마루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마을 뒤쪽 산꼭대기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洞神)을 모시는 마을제당이 있었다. 동신은 산신(山神)과 가까운 신격이다. 국사당 신앙은 산머리로 하강하는 천왕당 또는 천제당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산신당 신앙의 전단계적 형태를 국사당 신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25년 인왕산으로 옮기기 전 남산의 국사당도 현재 팔각정 자리가 그 터로써 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한양을 수호하는 국사당도 그 연원을 천신신앙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사당을 옮기는 장소로 왜 인왕산이 선택되었을까. 그것도 도성 밖에 있는 선바위 곁으로 가게 된 것일까.

서울 국사당의 명칭은 무학대사(無學大師)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풍수도참의 신이한 능력, 신도 선정 과정에서 정도전과의 갈등, 한양천도설과 건원릉 터를 정한 기연 등 구전설화와 야담에 무학대사의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는 왕사(王師)가 되자 바로 한양을 신도로 점치며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북악(北岳)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라고 조언하였다. 또한 조선이 천년을 가려면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터가 동향이라며 정도전이 반대하여 결국 주산(主山)은 북악이 되었고, 선바위도 불교가 흥할 것을 우려하여 도성 밖에 두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왜 인왕산을 서울의 진산으로 삼으라고 했을까

진산은 도읍지에서 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키는 주산을 일컫는다. 무학이 예언한 대로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조선 건국 후 정확히 2백년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터지고 5백년 국운이 다하여 조선왕조는 무너진 것일까. 후대의 이러한 설화에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의식세계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무학은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 남산을 안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은 남쪽을 향하고 인왕산은 내사산 중 우백호가 되었다. 실제로도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는 서산(西山)이었는데, 세종 때부터 불법을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인왕산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불법(佛法) 수호를 내세워 서산을 인왕산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있지는 않을까

조선 초기부터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표상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불법으로 조선왕조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이다. 원래 고대인도 신화에서 문을 지키는 신이었는데 불교에 수용되면서 불법과 불상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인왕의 모습은 사찰의 양쪽 문을 지키는 수문신장인 금강역사의 형상으로 묘사된다. 인왕산의 선바위를 바라보면서 수호신 인왕의 형상을, 그 우람하고도 강력한 힘의 금강역사상을 떠올리게 된다.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1973.1.26.)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1973.1.26.)

 

선바위와 암석숭배

선바위는 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상(石像)이 되었다는 돌 신앙 ⋅ 화석설화(化石說話)로 비춰진다. 선바위는 오래전부터 기자신앙(祈子信仰)의 대상이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암석숭배의 흔적을 선바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로 옮겨온 데에는 수호신 인왕이 지키는 산이라는 믿음과 이곳에서 빌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선바위 신앙이 함께 어우러진 때문은 아닐까.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복합되어 있는 곳이기에 국사당이 새로이 자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물론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가 인왕산 선바위였다는 일화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국사당이 들어선 뒤로 선바위에 대한 민간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조선후기부터는 국가제당이란 구실보다도 무신당으로서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더불어 신앙의 주요 대상지가 되었을 것이다.

인왕산 국사당은 소유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바뀌면서 무속의례인 굿을 행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굿당이 되었다.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 치병을 위한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진오기굿 등이 많았다. 굿뿐 아니라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이제 이곳은 인왕산도시자연공원이 되었다

공원 내에서 기도 및 무속행위 등을 할 수 없으며 위반 시 관련법에 따라 처벌된다 한다. 철조망에 묶여서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 보며 오래전 이곳으로 올라오던 사람들의 가슴에 어떠한 소망이 깃들어 있었을까 상상해 본다. 저마다 절박한 비원을 안고 올라왔을 것이다. 무언가 찾고 있는 또는 찾고 싶거나 찾아야 할 가치로 여기는 신념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절실함을 헤아려 본다. 기원의 대상으로 신앙하여 왔던 것들의 오랜 흔적들을 되짚어 보면서 해 기울어가는 인왕산 자락을 내려왔다.

선바위 아래 국사당 주변 곳곳에 민간인들이 신앙하는 대상물들이 어우러져 놓여 있다.
선바위 아래 국사당 주변 곳곳에 민간인들이 신앙하는 대상물들이 어우러져 놓여 있다.

 

인왕산도시자연공원 내에서 기도 및 무속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인왕산도시자연공원 내에서 기도 및 무속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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