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의 차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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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차이(2)
  • 최덕희 교수
  • 승인 2021.05.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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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영어(67)

19세기 초반 특히 1920~1930년경 미국도 캐나다도 당시 자본주의 국가로서 빈부 차이가 극심했다고 한다. 물론 각 분야의 산업이 더 발달했던 미국이 더 컸겠지만….

캐나다도 미국도 당시 하류층에 폐결핵이 흔했는데 여기에 캐나다 동부 출신 외과 의사인 노만 베쓘(Henry Norman Bethune 1890 - 1939)이 등장한다.

 

노만 베쑨은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당시의 사회 빈부 차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목사였던 부친을 따라서 사회주의에 경도된다. 베쑨은 토론토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해군의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1차 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군의관으로 비교적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영국 명문가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제대 후 미국과 캐나다를 왕복하며 개인 병원을 개업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창궐했던 폐결핵에 자신도 감염되어 무척 고생하게 된다. 이에 노만은 전공 분야를 아예 폐결핵으로 바꾸고 정진하여 폐결핵에 특별한 기흉 치료법을 발명하여 자신도 회복하고 많은 환자를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획기적인 치료 방법에도 불구하고 폐결핵 환자들이 증가하는 사실에 주목하고 더 근본적인 의료방식에 주목하게 되었다. 결론은 의료는 결국 부자들만 혜택을 보고 가난하면 혜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돈이 문제인 것이다. 이에 노만은 북미 최초로 의료 사회주의를 제창한다. 구체적으로 의료보험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의사는 현재도 그렇지만 의료 보험제도를 반대한다. 자신의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의료업계의 반대로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직 환자 치료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의사이며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사회주의자인 베쑨은 그 후 스페인 전쟁에도 참여하고 2차 대전 중에는 중국에 건너와 모택동의 팔로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게 되었으며 중국군의 현대적 의료기술 도입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불운하게도 그는 1939년 간단한 손가락 부상이 패혈증으로 확대되어 사망하게 된다. 결국, 그는 중국이 공산국가가 된 후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역사릉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비록 당대에는 그의 사회주의적 의료보험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후배 세대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의료계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 경제면에서도 사회주의적 가치를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결국, 그가 죽은 지 20여 년만인 1962년 북미에서 최초로 무료 의료보험 제도를 캐나다의 사스카치완 주에서 채택하게 된다. 이후 차례로 다른 주에서도 이 제도를 받아들여 모든 캐나다 국민이 혜택을 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캐나다의 경제는 명목적으로는 자본주의지만 그곳에서 살아보면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무척 가미된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보다 세금 제도가 부유층보다 빈곤층에 훨씬 유리하고 소위 복지 정책이 무척 잘 되어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미국의 1930년대는 캐나다처럼 빈부 격차가 매우 극심했고 당시 대륙을 휩쓴 대공항은 빈곤층에 훨씬 가혹했다. 노동운동은 매우 심하게 억압되었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그리고 정부의 노동자 탄압은 우리 박정희 독재 시절보다 훨씬 심했다고 한다. 그 후 50년대 초만 해도 반 공산주의는 극에 달해 아직도 그 여운이 실감 되는 형편이다.

 

이때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 - 1983)이 등장한다. 스코트 니어링은 부친이 광산을 소유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주변 광부들 생활상을 보게 되어 진보적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결국,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강단에 섰지만 출판과 강연을 통해 미국 산업사회를 비판하며 사회주의를 역설하게 되었다. 그의 진보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사상은 반전 평화운동 그리고 환경 생태 운동까지 넓혀진다. 결국, 권력층과 계속 갈등을 빚으며 모든 출판 강연이 금지되며 결국 대학교수직도 잃게 되었다.

스코트 니어링은 결국 미국 동부 외진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직접 지으며 남은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귀농 당시 그의 나이 50이었다. 그는 젊은 부인 헬렌 (Helen Nearing 1904 - 1995 결혼 당시 스코트는 50 헬렌은 25세였다고 한다)과 함께 기거할 집을 돌로 직접 지었고 먹을 채소를 직접 경작해 살아갔다. 스코트는 20세기 중반 이미 미국의 먹거리 대량생산의 폐해를 예견했으며 당시 미국의 산업사회를 비판했으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유기농업, 그리고 건강한 식생활을 전파 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인도 간디의 소박한 생활에 심취했던 철학자며 행동주의자였다. 하루의 반을 노동에 전념하고 반은 독서와 저술로서 보냈다고 한다. 생활에 꼭 필요한 수입은 메이플 시럽을 경작하며 얻으며 더 이상의 수고는 하지 않으며 농사철이 아닌 겨울은 주로 미국 각처로 이동하며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으로 보냈다.

평생 병원을 찾지 않았지만, 노동을 통해 그리고 신선한 채식으로 건강을 지켜 거의 100세의 삶을 유지하였다. 그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도 이제는 갈 때가 되었다고 명상하며 거의 한 달을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티다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진정한 도를 깨우친 만인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미국 동부 해안 두 부부가 살던 농장은 the Good Life Center (굿 라이프 센터 www.goodlife.org)로 법인체로 바뀌고 그의 사상을 신봉했던 제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매년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방문해 일정 기간 농사를 지으며 그의 사상을 따르려고 한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곳의 높은 세금을 이유로 돈 많이 벌려면 미국을 가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의사라도 일정한 수입 이상은 더 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수의 평범한 보통의 캐나다 사람들은 만족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세금은 대부분 하류층의 복지로 쓰이기 때문에 불만 없다고 한다. 미국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해 사업을 일구고 남보다 많이 벌어 풍요롭게 사는 모습을 대부분 선호한다. 즉 국가 경제체제는 국민 대다수가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가에 달린 문제이다.

결국 미국이나 캐나다에 모두 위대한 선각자가 탄생했지만, 캐나다는 노만 베쑨의 사상이 사회에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은 스코트의 생각이 주류층에서 거의 무시되며 산업사회 -> 대량생산 자본주의 -> 신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된 20세기의 역사가 결국 현재의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