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가 좋다
배꽃(梨花)
초의지상설점화(初疑枝上雪黏花)/처음엔 가지 위에 핀 눈꽃을 의심했는데
위유청향인시화(爲有淸香認是花)/맑은 향기 있어 비로소 꽃인 줄을 알았네
비래이견천청수(飛來易見穿靑樹)/푸른 나무 사이로 날릴 때는 잘 보이더니
낙거난지혼백사(落去難知混白沙)/떨어져 백사장에 섞이니 분간하기 어렵네
*이미지의 혼합과 시적 감동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시입니다. 배꽃이 하르르 하르르 허공에 파문을 만들면서 떨어지는 정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합니다.
배꽃은 벚꽃과 달리 유독 희어서 눈을 연상시킵니다. 그 향기가 아니라면 자칫 눈으로 오인 할 수도 있습니다. ‘초의지상설(初疑枝上雪)’은 마치 이백의 ‘정야사(靜夜思)’라는 시에서 달빛이 내린 것을 보고 서리인 줄 알았다는 ‘의시지상상(疑是地上霜)’이란 시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경우 표절의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인구에 회자하는 선인들의 명시에서 한 구절을 따다 절묘하게 읊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오히려 오리지널로 지은 시보다 선인의 명구를 인용해 더욱 시를 빛나게 할 때 그 천재성을 극찬해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보는 천재입니다. ‘눈’과 ‘백사장’의 흰색 이미지를 갖다 붙여 희디 흰 배꽃의 진가를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전혀 다른 사물이 하나로 혼합된 이미지로 도출되면서, 그 눈부심이 형언하기 어려운 시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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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배꽃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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