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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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 권용철 작가
  • 승인 2020.11.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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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이 책은 경향신문의 <내 인생의 책> 코너에 이만수 야구감독이 소개한 것을 보고 읽게 된 책이다. 제목도 익히 알고 있던 것이고 평소에도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유명 야구감독마저 언급하는 바람에 선뜻 사게 되었다. 책 구입을 평소 인터넷으로 하는데 이 책도 예의 같은 제목의 여러 출판사 책을 검색하다가 ‘다락원’ 출판사 책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책값이 제일 싸서였던 게 아닐까 싶다. 택배로 받아본 책은 문고판처럼 작고 얇아서 대하기가 아주 편했다. 사실 두꺼운 책은 운전 시비 중 덩치 큰 남자를 만난 것처럼 부담스럽고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불행하게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완본이 아니다. 고3 수험생들을 위한 논술시험용 가이드북으로 출판된 요약본이다. 순간 낭패감이 밀려오며 읽을까 말까? 잠시 고민이 들었다. 평생을 본전 생각을 하며 살아왔으므로 외출 시 버스나 지하철에서 간편하게 읽기에는 괜찮겠다 싶어 포기하지 않은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한마디로 큰일 날 뻔했다. 고3 논술시험용이라는 말에 얕잡아본 이 책은 완본을 읽었더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성싶다. 중간에 포기했거나 뜻도 모르고 대충대충 넘어갔을 게 분명하다. 입시생 요약본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완본이었으면 어쨌을 것인가!

윤리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정치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논술용이라는 입시용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인간의 삶이 결국 행복의 추구에 있으며 그러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인 구성 속에서 상호 연결, 협력, 길항 등 다양한 의식과 본능, 지식과 체험으로 영위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용기, 절제, 자유, 포부, 명예, 온화, 탁월, 진실, 재치 그리고 정의 등 인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언급이 망라되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준 철학 이야기라서 그렇게 붙여진 제목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을 마무리하면서 윤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정치학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결론지은 대목에서는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개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구속하고 관여하는 것은 결국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 무슨 순백의 무균질이거나 속세의 고고한 인생이라고 착각한다. 정치를 빼놓곤 우리는 한 발자국도 행복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부분이다. 엄청난 반전이 전개된다. <논술 노트>라고 이름 붙여진 ‘마치면서-젊은이여, 부디 긍지를’이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는 논술수험생들에겐 ‘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독’이 되는 글이다. 좋은 책을 훌륭하게 요약하면서 마지막에 웬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이러한 실수는 이 책이 철학책이라는 데서 그 태생적 모순을 벗어날 수가 없다. 철학이 입시로 평가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입시논술에서 한 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그래서 원하는 명문대에 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요약해서 알기 쉽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너무 진도가 나가 그만 진짜 철학을 설파하고 말았다. 입시용 철학을 말해야 하는데 인생용 철학을 말해 버린 것이다.

지금 여기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이 천국이다

<논술 노트>를 쓴 선생님의 반전 명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요즘 젊은이들 사는 꼴은 더는 지켜보기 힘들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무슨 노인네를 상대하는 것 같다. 아직 40대 중반인 나도 안 하는 생각을 하는 거로 봐선 세상 이치 다 꿰뚫고 벌써 한 50~60년은 산 것 같다. 언제부터 그렇게 밥 굶었다고, 헐벗었다고 온통 먹고사는 걱정, 그런 전망뿐이란 말인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나라’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긍지가 없는 거다. 자기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생명에 대한, 남들 하지 않는 일이더라도 그것이 나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는 것, 사소한 일은 사소하게 고귀한 일은 고귀하게 다룰 줄 아는 것. 굶주릴지언정 억지로는 하지 않는 것. 누가 뭐라 해도 나쁜 건 나쁜 거고 좋은 건 좋은 거라고 말하는 것. 몰래 숨어 속삭이지 않고 당당하게 그렇다, ‘아니다’를 외치는 것. 대신 제 이익과 관련된 이야기는 떠벌리지 않는 것. 언제 목소리를 높이고 언제 목소리를 죽이는지를 보면 그의 긍지를 알 수 있다. 목숨 걸고 덤비는 게 고작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공부다. 왜 반드시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대학이 도대체 뭘 가르쳐주는데? 고작 직업훈련소 정도밖에 안 되는 곳 아닌가. 하긴 그래서 간판이 필요한 거다. ‘SKY 직업훈련소’라는. (이게 논술 선생님이 하실 말씀인가!)

실력자가 될 생각을 해라. 내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 내 능력, 내 재주, 나만의 것 그걸 제대로 써먹는 것이 예수가 말한 천국의 삶이다. 천국은 뒈져서 찾아가는 곳이 아니다. 말씀만 줄줄 왼다고, 기도나 해댄다고, 교회나 절집을 열심히 들락거린다고 가는 곳도 아니다. 지금 여기 내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누리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별들이다.” 왜 기를 쓰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서까지 타락하려는가?

논술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이 보석처럼 빛난다.

‘천국은 뒈져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과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서까지 타락하려고 하는가?’ 라는 말씀은 요즈음 들은 말 중에서 제일 명문이다. 속히 후련하고 그 어느 철학책보다 더 가슴을 때린다.

논술 선생님이 펼치는 진짜 철학 강의에 박수를 보낸다. 학생들은 비록 점수에서는 손해를 보았을지 모르지만, 논술시험보다 더 중요한 인생을 보게 해준 데에 대해 선생님께 오랫동안 감사해야 한다. 논술성적 오르는 것은 인생에 한 번으로 끝나지만, 선생님이 말한 인생론은 학생들이 살아갈 인생에 두고두고 약발을 뿜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 논술 선생님은 되지도 않은 수험생 논술시험에 대해 강의할 게 아니라 속세로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면 지금보다 열 배가 넘는 연봉을 올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