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화국을 만드는 인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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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화국을 만드는 인문여행
  • 윤호창 기자
  • 승인 2020.10.29 16: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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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화국 2차 집담회, 10.16~17 함양에서 가져

함양(咸陽).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 있어 볕이 많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따뜻한 기운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했던 것일까? 함양으로 향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함양에 들어서니 위천(渭川)이 보인다. 크고 작은 13개 나라의 수도였다는 중국 서안의 옛 이름 함양. 이곳 선인들도 고도의 영광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함양 들어가는 길에도 위수(渭水)가 있어 많은 시인묵객들이 그곳에서 이별을 노래했다.

함양, 제1차 아나키스트 전국대회가 열렸던 저항의 공간

보이는 것은 산밖에 없는 가난한 땅이지만, 함양 선비들의 뜻은 높았던 모양이다. 해방되고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함양 안의면에서 첫 번째 아나키스트 전국대회가 열렸다. 지금이야 대진 고속도로가 열려 서울에서 세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함양은 경상도에서도 접근하기 힘든 곳 중의 하나였다. 교통편도 여의치 않았을 그 시대에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곳곳에서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던 600여명이 몰려들어 나흘간의 전국대회를 열었다. 아나키스트는 반국가주의, 무정부주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국가가 가지는 전체주의와 폭력성을 알았기에 그들은 무엇보다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율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했다. 아나키스트는 자율적 자치주의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온갖 봄꽃들이 만발했을 용추계곡에서 4월 20일부터 나흘간의 전국대회를 열고 석달 뒤에 서울에서 전국정당을 만들었다. 그 이름은 독립노농당.

 

연수원 옆에 있는 위천의 계곡. 구비구비마다 정자가 있다.사진에 보이는 정자는 제일 상류에 있는 거연정
연수원 옆에 있는 위천의 계곡. 구비구비마다 정자가 있다.사진에 보이는 정자는 제일 상류에 있는 거연정



서하면에 있는 함양의 우리말이라는 '다볕'자연연수원에서 마을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이틀간의 집담회가 열렸다. 분단과 독재로 인해 우리에게 복잡한 느낌이 드는 단어가 ‘공화국’이다. 서구 근대는 왕정의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공화국 건설의 역사였지만,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왕정은 초라하게 몰락했고, 해방이 되었을 때 국체가 민주공화국이라는 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남쪽이나 북쪽이나 일인독재, 일당독재를 했던 이들도 이름만은 공화국이이서 명색이 어지러웠다.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가까웠기에 이름이 혼란스러워도 그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마을공화국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상생활에서 공화정을 만들어보자는 작지만 거대한 정치실험이다. 이름만 그럴싸한 부실한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 제대로 된 공화국의 역사가 별로 없는 한국 사회에서 가능할까?

자치, 이승만 정부에도 있었으나 아직도 부활하지 못한 주민권력

마을공화국. 한국사회에서 근대화와 산업화는 바로 마을과 공동체 소멸의 역사였다. 건국을 하고 제1공화국 시절에는 읍장, 면장은 물론이고 이장, 통장도 직접 뽑아서 자치할 수 있는 마을공화국의 단초가 있었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바로 직선제를 폐지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배치했다. 60년대 풀뿌리 바닥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자치의 움직임은 70년 초반 유신과 함께 시작한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줄 세우기로 마을자치력은 급속하게 해체되어 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해체됐던 자치력을 회복하고, 다시 마을과 읍면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화국의 모습을 설계하자는 이번 집담회에 전국에서 50여명이 참여했다.

 

50여명의 활동가들이 집담회하는 장면
50여명의 활동가들이 집담회하는 장면

집담회에서 다양한 제안과 토론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 발제는 남양주에서 온 양홍관 선생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양홍관 선생은 자치, 협동, 평등, 평화, 복지, 생명, 연대의 가치를 바탕으로 △ 읍면동 단위에서 자치모델의 과제 발굴과 모델확산 △ 읍면동을 기초한 수평적 네트워크 △ 다양한 대회를 통한 민회의 확산 △ 리더쉽의 발굴과 육성 등을 제안했다.

대통령 직속 자치분권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상한 경상대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자치분권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에서도 읍장, 면장을 직접 뽑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있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복원되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생활 단위에서 자치와 민주주의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특히 역사는 언제나 3%의 뜻있는 사람들이 이끌어왔다면서 읍면동 생활세계에서 새로운 비젼을 만들어나갈 혁신활동가를 양성해야 함을 강조했다.

세 번째 발표는 마을주치의 제도의 확산의 모색하자는 임종한 교수의 제안이었다. 급속하게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는 있는 한국 사회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새로운 의료와 돌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제안이다. 의사 1인이면 1500명 주민들의 주치의가 돼 전 생애에 걸쳐 건강을 돌볼 수 있는 만큼, 마을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고 주민들은 의료생활협동조합을 통해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의료제도라는 주장이다.

네 번째 발표는 함양에서 다볕자연연수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원 선생의 교육사례다. 연수원이 있는 서하면의 유일한 서하초등학교는 한 때 전교생이 1천명이 넘는 곳이었지만, 지난해 14명밖에 없어 폐교 위기에 몰려 있었다. 지난해 학생모심위원장을 맡은 장원 선생은 전교생 해외연수, 전교생 장학금 지급, 학부모 일자리와 주택 제공 등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폐교의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대기자들도 몰려 있는 사례를 이야기했다. 장원 선생은 마을의 혁신과 마을공화국을 위해서는 ‘발칙한 상상력과 뛰는 가슴’이 중요함을 지적했다.

저녁에 참여자들은 오후의 발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제안과 토론으로 이어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개개인들의 실질적인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살고 있는 곳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지역민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함을 공감했다. 내년에는 ‘직접민주주의 전국민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뜻을 모으자면서 함양모임 참여자들은 다짐문을 만들었다.

참여자들의 뜻을 모으고 정리하는 장면


직접민주주의마을공화국 전국민회 준비모임의 함양다짐

우리는 유서깊은 선비의 고장 함양에서 제2회 마을공화국 집담회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함양 땅에 모여 (가칭) 직접민주주의마을공화국전국민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헬조선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암덩어리들을 제거하고 잘못된 구조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희망의 대장정을 시작하고자 함입니다. 그 희망 대장정은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숙의•대의•공화주의가 어우러진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일과 동시에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된 절반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이제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려고 합니다.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또한 위보다 바닥이 더 우선되어야 하며, 국가가 아니라 마을과 지역의 생활세계의 구축이 더 필요하며, 경쟁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이 공생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아래와 같은 다짐을 안고 내일을 맞이하고자합니다·

[우리의 다짐]

하나, 오늘 모인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주민들 스스로 자기입법(마을헌장,규약,조례) 자기통치(자기책임과 자주관리)할 수 있는 마을민회, 지역민회를 만드는데 스스로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둘, 우리의 민회는 상위민회보다 풀뿌리지역 민회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보충성의 원리’와 더불어 함께 크게 연대하는 ‘연방의 원리’에 기반해 읍면동 풀뿌리지역 씨알 민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합니다.

셋, 우리는 전국민회가 발족하기까지 1년에 세 차례의 지역순회 집담회와 한차례의 전국대회를 열어 성장의 결실을 공유하고, 이를 계기로 더 많은 민회와 더 견실한 민회가 만들어져 ‘자율마을주의자’들의 도반공동체가 점(點)•선(線)•면(面)으로 확대되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넷, 우리는 우리의 민회가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할 것을 선언합니다. 스스로 자유롭고 타인을 포용하는 자주인이 되기 위해 절차탁마하며, 살고 있는 곳에서 동지들과 뜻을 모아 지역민회를 건설하며, 국가를 넘어 동아시아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민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연대하고 협력합니다.

다섯,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위기에 깊은 공감을 하며 ‘생물지역주의’에 기반한 생태감수성을 가지고, 자연과 지역생태계와 더불어 가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여섯,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계임을 알기에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현답을 찾아 나가며 구동존이•화이부동의 기풍을 진작시켜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2020. 10. 17

제2회 함양마을공화국 집담회 참가자 일동

다음날에는 20년 전에 대한 녹색문명, 생태문명의 뜻을 펼치고자 함양 백전면에 세운 전국 최초의 대안대학라고 할 수 있는 ‘녹색대학(현재 이름은 온배움터)’을 방문했다. 운동장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풀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곳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다양한 곤경에 몸 고생,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 이들이 설명을 들으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지, 거친 현실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현장이었다. 녹색대학 20년간 역경을 바탕삼아 새로운 꿈이 만들어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최초의 대안대학이라는 녹색대학 전경
최초의 대안대학이라는 녹색대학 전경

직접민주주의와 마을공화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힘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명암이 교차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방역과 문화 등에서 뛰어난 활약한 보이는 반면에, 올해 UN에서 발표한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조사대상국 153개국 중에 140위에 불과했다.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수준이다. 한국 사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부분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고, 행복감과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다. 우리 사회의 자살율이 유독 높은 것도 그런 부자유에 일단의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정적인 삶을 제대로 허락하지 않은 국가복지와 사회안전망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서로에게 튼튼한 안전망과 비빌 언덕을 만드는 일은 지역과 생활세계로부터 다시 촘촘하게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마을과 지역을 통해 만들어야 할 새로운 공화국의 모습은 GDP와 같은 숫자만 화려한,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한 곳이 아니다. 타인을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충분한 자유와 행복 그리고 사회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우리 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마을과 생활세계를 재구축해나가는 길이 가장 유력하다.

새로운 마을공화국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고 힘든 길이 되겠지만, 함양의 공기는 맑았고 가을 정취는 더 없이 고즈넉했다. 복잡다단한 인간세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깊어가는 함양의 가을을 만끽하고서 3차 모임은 1월에 남양주에서 가지기로 하고 좋은 벗들과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 했다.

 

함양에서 바라본 산
함양에서 바라본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