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대왕대비 의화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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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대왕대비 의화궁주
  • 신영란 작가
  • 승인 2019.11.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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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정비 노국대장공주

 

“날마다 술 한 병씩을 의화궁주 안 씨에게 내려주었으니, 곧 전조(前朝) 공민왕의 정비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5월 25일의 기록이다. 고려가 멸망한 지 20년도 지난 시점, 의화궁주는 조선의 관대함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공민왕의 정비’라는 타이틀이 주효했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여인은 노국대장공주가 유일했다. <고려사>는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여러 왕비를 맞아들였으나 별궁에 두고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라고 기록한다.

왕은 죽은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호화로운 영전을 짓게 했다. 이때 앞장서서 영전 공사를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의화궁주의 부친 윤극인이다. 이 일로 윤극인은 파직되었고 덩달아서 그녀도 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공민왕은 훗날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으나 심복들과 동침을 강요하는 등 엽기적인 방법으로 성적 학대를 가했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울부짖어 기막힌 왕명을 뿌리쳤으나 별궁의 여인 하나는 불륜의 와중에 아들을 낳기도 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별궁의 여인들은 비구니가 되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우왕은 재위 14년 동안 여색에 빠져 살았다. 선왕의 정비인 안 씨에게도 노골적인 흑심을 드러냈다. 툭하면 야심한 시각에 대비전을 찾아 술을 찾는가 하면, ‘왜 나의 후궁들 가운데 어마마마처럼 빼어난 미인이 없느냐’고 탄식했다.

낯뜨거운 추문이 궐 밖 민심까지 어지럽히자 대비는 친정 조카를 궁에 들여 사태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이후로도 우왕은 수시로 그녀를 농락하려 들었다.

1388년, 쿠데타에 성공한 이성계는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면서 왕대비에게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했다.

‘불행히도 왕은 후사 없이 훙서하셨다.’

대비전에서 나온 교지 한 장으로 우왕은 물론 창왕의 정통성도 부정당했다. 이것은 이성계 일파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우왕이 공민왕의 핏줄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교지로 인해 그 아들 창왕 또한 즉위한 지 1년 만에 왕좌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았다.

1392년, 왕대비 윤 씨는 이성계에게 옥새를 갖다 바치고 그를 새 왕으로 옹립하는 마지막 교지를 선포한다. 왕실의 큰 어른인 그녀가 반역자에게 나라를 내준 셈이다.

종묘 공민왕 신당 내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영정<br>​​​​​​​사진 출처- 한국 콘텐츠 진흥원
종묘 공민왕 신당 내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영정
사진 출처- 한국 콘텐츠 진흥원

 

조선이 개국한 뒤 그녀는 의화궁주로 강등되었으나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까지 극진히 우대하며 정권 홍보의 얼굴마담으로 삼았다.

“의화궁주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

태종 18년 8월 6일의 기사는 그녀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 뒤를 이은 세종은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처형당한 박포의 집을 하사하여 조정의 변함없는 신임을 과시했다.

1428년, 고려왕조가 멸망한 지 36년째 되던 해 그녀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쌀과 콩 각각 100석을 보내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공민왕의 정비로 신원을 복원시켰다.

그녀의 궁 밖 생활에 관해선 술과 연회에 관련된 이야기뿐이라 한때나마 일국의 왕비였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한다.

혹자는 그녀가 이성계를 옹립하는 교지를 내린 것을 두고 경국지한(傾國之恨)에 비유하기도 한다. 대세가 이미 기운 마당에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교지였든 역량 밖의 일이겠으나, 남편과 아들에게 능욕당한 왕비의 포한이 종국에는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탄식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을 터다.

 

 

신영란 작가

 

여성의 삶과 역사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여자, 사임당". "지워지고 잊혀진 여성 독립군열전", "용을 삼킨 여인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