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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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設)
  • 지호원 작가
  • 승인 2020.05.2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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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원 작가의 글쓰기 강좌(26)

 

그럼 옛날 사람들은 수필을 어떤 형식으로 썼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문학사에서는 시대를 구분해 20세기 이후의 수필을 현대수필, 그 이전 시대의 수필을 고전 수필이라고 부르는데, 고전 수필은 고려 후기 무렵부터 창작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보통 양반들은 한문으로, 여자들과 평민들은 한글로 썼다. 특히 여자들이 쓴 수필을 '내간체 수필'이라고 하는데 부드럽고 우아한 표현이 특징이다.

고전 수필의 대표적인 형식 중 하나는 '설(設)'이라는 것이 있다. 설은 한문으로 쓰인 2단 구성의 글로 사실을 먼저 제시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사물을 이치에 따라 해석하여 옳고 그름을 밝힌 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중수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사용되는 설이라는 한자가 이야기를 뜻하는 ‘말씀 설(說)’자, 대신 ‘베풀 설(設)’자를 썼다는 것이다. 말씀 설자는 보통 설교하다, 설득하다 할 때 사용하고, 베풀 설자는 학교나 기업을 설립하다, 공장에 기계를 설비하다 할 때 사용한다. 즉 교훈적인 이야기를 베푼다는 뜻이다.

가자미눈을 뜨고 좀 삐딱하게 바라보면, 세상 이치를 모르는 너희들에게 가르쳐서 깨닫게 해준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럼 설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으로 쓰인 수필일까? ‘동국이상국집’이라는 책을 남겨 고려 시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규보의 〈이옥설 理屋設〉이라는 작품을 감상해 보자

여기서 이자는‘ 다스릴 이’자고, 옥은 ‘집 옥’자다. 해석하면 집을 가꾸는 이야기다.

“ 행랑채가 퇴락하여 지탱할 수 없게끔 된 것이 세 칸이었다. 나는 마지 못하여 이를 모두 수리하였다. 그런데 그중의 두 칸은 앞서 장마에 비가 샌 지가 오래되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고, 나머지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샜던 것이라 서둘러 기와를 갈았던 것이다. 이번에 수리하려고 본 즉 비가 샌 지 오래 된 것은 그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었던 까닭으로 수리비가 엄청나게 들었고,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았던 한 칸의 재목들은 완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던 까닭으로 그 비용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에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 자신이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서 못쓰게 되는 것과 같으며, 잘못을 알고 고치기를 꺼리지 않으면 해(害)를 받지 않고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저 집의 재목처럼 말끔하게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도 이와 같다. 백성을 좀먹는 무리들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런 연후에 급히 바로잡으려 하면 이미 썩어 버린 재목처럼 때는 늦은 것이다.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 이규보의 이옥설(理屋設) 

읽은 것과 같이 이 수필은 낡아서 무너진 행랑채를 수리한 경험을 먼저 제시하고, 여기서 깨달은 바를 유추하여 뒤에 삶과 정치에 적용한 내용을 쓰고 있는 형식이다.

잘못을 미리 알고 고쳐나가야 한다는 뜻이고 주장이다.

이규보는 1,200년 전후를 살았던 고려 시대 사람으로, 이 시기 고려는 최 씨 무신 정권이 약 80년간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였으며 몽골의 침입도 잦아 백성들의 삶이 무척 고달팠던 때이다.

위 글에서 ‘백성을 좀먹는 무리들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는 내용은 요즘 말로 하면 아마도 기득권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필은 이렇듯 개인적 이야기를 소재로 동시대의 잘못된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는 풍자와 교훈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신문의 논설이나 사설이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위해 시종일관 논리적으로 글을 써가는 데 반해 중수필은 이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