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우거진 창경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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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우거진 창경궁에서
  • 이영재 기자
  • 승인 2020.05.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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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정원 속에 담긴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

 

창경궁에는 아름다운 종로가 담겨 있다. 은은한 분홍 빛깔을 뽐내며 봄이 왔음을 자랑했던 벚꽃과 살구꽃이 지고 난 뒤 그 자리에는 온통 맑고 은은한 담록의 빛이 가득히 채워졌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의 5대 궁궐로 손꼽히는 창경궁은 1483년 조선시대에 건축되어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창경궁에서 정문과 중문, 금천교, 정전, 편전 등 다양한 건축물을 만나볼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6월에는 인문학 특강(6/5, 6/12)과 주간 고궁음악회(6/6~6/28, 주말) 등의 행사도 찾아볼 수 있어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가득하다.  

여러 볼거리와 들을거리 중에서도, 사람이 건축하고 만들어 낸 것들이 아닌 창경궁의 자연에 집중해보려 한다. 인간은 흔히 "백세인생"이라 하지 않는가. 나무들이 이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300년 이상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이 많기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던 창경궁의 정원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와 창경궁의 담록이 주는 메시지에 집중해 보았다.

 

 

3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나무들이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언제나 나무들의 곁을 지켜 온 이름 없는 들꽃들 때문일 것이다. 매년 수도 없이 피고 지는 들꽃들이 나무의 주변을 포근하게 둘러싸며 나무를 지켜준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들꽃들이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들꽃들은 춥고 어두웠던 겨울을 참고 이겨낸 들꽃들이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만 눈에 들어오는 들꽃. 보아주는 사람 없이도 끊임없이 스스로 피고 지는 들꽃.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질긴 들꽃들이 가슴으로 싱그럽게 들어온다.

 

나무를 바라보며, 좋아하는 시를 한 편 읊어본다.

 

나무 같은 친구/ 강시연

 

나에게도
제제의 라임 오렌지 나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쿵저러쿵
아무렇게나 말하여도
조용히 들어주는 나무

그럼 난
그 나무 친구에게
이끼나 작은 풀꽃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마음

또는
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넓은 포용력을 배워 올거야

사철 그 자리에서
어깨를 내어 주는 나무

 

창경궁의 봄날에 온통 푸른 빛만 도는 것은 아니다.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들꽃들 사이 희끗희끗한 꽃과 나무를 보는 것은, 마치 언제나 검은색일 것만 같던 머리카락 사이 희끗희끗한 흰 머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경궁에 핀 할미꽃도 꽃이 필 때에는 진하게 붉은 빛을 띄는 보랏빛을 뽐내다가, 꽃이 지고 난 후에는 백발 노파의 머리와 같이 하얗게 된다. 백송(白松)도 어릴 때는 초록색이었다가, 나이가 들수록 줄기에 하얀 얼룩이 생기며 점차 하얗게 변해 간다. 언제나 푸를 것만 같은 봄날의 창경궁에도 하얀 빛이 돌듯이, 언제나 푸를 것만 같은 우리의 인생에도 하얀 빛이 조금씩 돌게 된다. 

이를 기억하며 창경궁을 거닐어 본다면 그곳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인생과 그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래토록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과 곁에 핀 들꽃들, 하얀 머리와 가지를 흩날리며 스치듯 기분 좋은 바람에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미꽃과 백송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창경궁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생명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